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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입으로 그림 그리는 장애인 화가 최태웅씨의 '어느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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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 1급, 1년여 전 입에 문 '붓'

편견에 상처 받지만 '나는 멋지다' 최면

"온 에너지 담아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

새 스케치북을 처음 받은 날, 최태웅(38) 작가는 문득 겁부터 났습니다. 새하얀 종이를 자신이 망쳐버릴 것 같아서였죠. "선생님, 저 스케치북 말고 저기 벽에 걸려있는 달력 몇 장만 찢어서 주시면 안 될까요?" 그날은 1년 4개월 전 최 작가가 처음 그림을 그린 날이었습니다. 최 작가는 그렇게 2주 간 달력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입에 붓을 물고요.

지난달 19일 경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서 최 작가를 만났습니다. 최 작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입니다. 뇌병변 1급 장애인인 그는 태어난 지 한 달째 되던 날 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신 뒤 운동신경이 마비됐습니다. 돌잔치에서 돌잡이도 제대로 못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지난달 19일 경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서 만난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최태웅(38)씨. 그의 뒤에 보이는 그림은 가장 최근 그가 완성한 '어느 봄날'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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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센터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갔을 때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벌컥 화가 났죠.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요. 그런데 선생님이 '한 번 붓을 입에다 물 생각은 없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릴수만 있다면 물겠다'고."

그날 이후 활동보조 선생님과 사온 열두 가지 색 물감을 집에 진열해 놓고 최 작가는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림을 참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누나는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그게 어릴 때 너무 부러웠어요. 그 장면이 갑자기 머리속에 휙휙 지나가는데 엄청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그림을 그리게 된 지도 1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최 작가는 생전 처음 그림 전시회를 열고, 지난 6월 인천에서 열린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까지 땄습니다. 지난달 11~14일에는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도 출전했습니다.

"저는 자연을 그리는 게 좋아요. 신이 만드신 자연을 최고로 잘 그릴 때까지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요."

최 작가는 무척 밝았습니다. 인터뷰 내내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농담을 건네고 먼저 웃어보였습니다. "원래 성격이 밝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장애인들이 겪는 '시선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한국에 사는 많은 장애인들이 '시선' 때문에 안에만 있으려고 해요. 당장 휠체어 끌고 밖에 나가면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거든요. 한 번은 어떤 아이가 엄마랑 가는데 저를 보더니 '엄마, 저 오빠는 왜 그래?'라고 묻더라고요. 근데 엄마가 애한테 '엄마 말 안 들어서 저렇게 된 거야'라고 하는 걸 들었어요. 저 엄마 말 진짜 잘 들었거든요. (웃음) 너무 속상했어요."

나가기 전 거울을 볼 때마다 최 작가는 늘 최면을 건다고 합니다. '나는 잘생겼다. 나는 잘생겼다. 다들 부러워서 쳐다보는 거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꿔나가기 시작하면서 요새는 집에 있는 거보다 오히려 나가는 걸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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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경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서 구족화가 최태웅(38)씨가 입에 붓을 물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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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작가는 취재팀에게 직접 그린 그림 몇 점을 보여줬습니다. 얼마 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그렸다는 '어느 봄날'이라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과 분홍색 벚꽃이 어우러져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모든 계절이 봄에서 시작되듯, 마음의 상처를 딛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아직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에 상처를 많이 받아요. 제 후배들은 그런 상처 안 받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그릴 때면 그런 일들이 다 지워지고 행복해져요."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온 몸을 움직여 정교하게 붓터치를 해야 하니까요. 그림 한 점을 완성하면 늘 진이 빠집니다. 그래도 화폭에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거, 보고싶은 것들을 마음껏 담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풍경 속에 사람은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게 그의 목표입니다.

취재팀을 위해 최 작가는 즉석에서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한 시간 반 남짓 그가 집중해 그린 건 가을 들판에 우뚝 선 나무 세 그루였습니다. 그중 가운데 나무는 보라색 나무였는데요. 유독 둘레가 크고 뿌리도 튼튼해 보였습니다. "'가운데 나무가 나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그렸어요. 양 옆에 두 나무는 저에게 늘 힘이 되는 고마운 분들이고요." 최 작가가 정한 이 그림의 제목은 '환상의 세계'였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WnyqTsk86NFkmzranBFkLw

'김모씨 이야기' 취재팀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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