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7)
<9>가난한 나라 과학자의 소명
-김법린 원자력원장, 중국인 첫 노벨상 수상자 의미 질문
-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한 중국인 리정다오·양전닝
-시카고대에 유학하고 연구 여건·대우 좋은 미국 남아
-리는 컬럼비아대, 양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근무
-과학기술 유학 떠나 박사 학위 받아도 귀국 않고
-가난한 조국 중국엔 아무런 도움 주지 못한 점 지적
어느 날 김 원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원자력원 수습행정원으로 일하다 보니 어느덧 미국 유학을 떠나야 할 시간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다시 물리학 전공으로 돌아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니 마음이 들떴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에서 유학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물리학을 공부하러 가게 됐으니 자부심도 컸다. 머릿속은 뭔가 이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국에서 입자물리학을 공동으로 연구한 끝에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함께 수상한 중국인 리정다오(李政道·92)와 양전닝(楊振寧·96). 중일전쟁이 한창인 시절 피난 대학에서 어렵게 공부한 이들은 전후 미국 시카고대로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았다. 김법린 원자력 원장은 이들의 수상에도 중국은 여전히 과학기술이 낙후하고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음을 지적했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렇게 말문을 뗀 김 원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당부를 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언급하며 내게 질문을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중국인 과학자 두 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 않았는가. 그 과학자들은 미국 시카고대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 남아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지. 그러면 그 사람들이 받은 노벨상은 중국의 것인가. 미국의 것인가?”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받은 중국인 리정다오(李政道·92)와 양전닝(楊振寧·96). 중국인이 수상한 첫 노벨상이다. 당시 리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양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이었다. 이들은 49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입자물리학을 공동으로 연구해왔는데 그 성과로 각각 31세와 35세의 젊은 나이에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과학자 개인에겐 최고의 영광이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
하지만 당시 중국은 여전히 과학기술 수준이 뒤처지고 가난한 나라였다. 두 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사정은 나아질 수 없었다. 산업을 살릴 과학기술자는 유학을 떠난 뒤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은 부흥을 위해 과학기술 두뇌에 목마른 상황이었다. 이는 한창 6·25전쟁 전후 복구 과정에 있던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김 원장은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들의 노벨상 수상이 중국의 경제발전과 민생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를 내게 따져 물었던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