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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기고] `욱일기=전범기` 논란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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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오는 10~14일 제주에서 열리는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하지 않기로 발표함에 따라 욱일기 게양 논란은 결국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바라보면 왠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핵심적인 것은 '욱일기=전범기'라는 주장이 국제적으로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는 점이다. 혹자는 일본의 '욱일기' 집착을 나치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 비판하기도 한다.

미국을 비롯한 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 자신들의 이익에 의해 독일에 비해 관대한 기준을 일본에 적용했다는 논거다. 이 주장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도래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그들의 미래 협조자를 배려한 전승국들의 정책은 비슷했다. 많은 나치 제3제국 협조자들이 전범재판 이후 감형을 거쳐 사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의 경우 확실한 단죄 과정을 거쳤다.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사형당한 나치 1급 전범들 시체는 전원 화장 처리됐고, 별도 묘역을 조성하지 않았다. 일본도 동일했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 문화권에는 '야스쿠니 신사(神社)'가 없었고, 연합국 측이 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전범국가들 상징이 국제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표방한 사상이나 주장 그리고 정책이 인종청소나 집단학살 등 비인도적 행위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이 해당 시기 군국주의 정권에 의해 전용(專用)으로 제작·활용됐는지도 판단의 기준이 됐다.

나치 청산의 경우 히틀러와 그 숭배자들에 의해 고안됐고 인종주의를 선동했던 모든 상징이 금지됐다. 번개를 연상하는 친위대 마크,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 나치식 경례 등이 대표적이다. 단, 프로이센 시절부터 쓰이던 상징, 예를 들어 철십자 훈장이나 독일군 계급장은 금지되지 않았다. 나치가 쓰기는 했지만, 나치 전용은 아니었고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욱일기 역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됐지만, 그 제정은 메이지유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에게는 유신 이후 일본이나 1920년대 이후 발흥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그게 그거라고 여겼겠지만, 국제적 기준의 잣대를 들이댈 때에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유신 부정은 '천황'에 대한 부정이요, 근대 일본 정체성 거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승국 역시 대부분 제국주의를 해본 국가들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계없이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과거 자체를 전면 부인한다면 제대로 깃발이나 상징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는 현대 국제 관계에서 그리 흔치 않다.

이 때문에 대외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할 때에는 국제적 관행 위반을 가지고 접근해서는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전범'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과거 퇴행적인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판을 불러올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상대 국가가 심리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상징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는 일본의 행위를 부각해야지, 국제 관행 위반을 물고 늘어지면 우리도 비슷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

또 하나, 욱일기가 영구적인 거부 대상인가, 아닌가도 우리 자체적인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이는 중국·북한과 관계에서도 중요한 함축성을 지닌다. '전범기'를 "우리에게 전쟁으로 고통을 강요한 국가의 상징"으로 규정한다면 '한국전쟁'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상흔(傷痕)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과연 한중 수교 이후 베이징은 이에 대해 작은 유감이라도 표명했던가. 북한이 그들의 침공으로 발생한 우리의 희생에 대해 어떠한 언급이라도 있었던가. 평양이 아무런 과거 언급 없이 인공기를 서울에 가져올 경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욱일기 논란이 남긴 전혀 새로운 그늘도 이제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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