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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춘향전`에 빠진 노벨문학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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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31~2012)는 한국 시인들도 쉼 없이 애정을 표현해온 '시인들의 시인'이다. 그의 독서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읽거나 말거나'(봄날의책 펴냄)는 시인이 1967년부터 35년에 걸쳐 쓴 서평을 모은 책. 시인은 책에 실린 글을 '비필독도서 칼럼'이라 명명한다. 문예지 서평으로는 순수 문학이나 정치적 논평물이 선호되어 회고록이나 인문학술서 등은 평론가 손에 들어갈 확률이 희박하다는 불만을 표하며 시인은 "문득 나는 이런 책들에 관심을 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 T S 엘리엇의 '고양이에 관한 시' 등 문학을 읽고 쓴 글도 있지만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제인 구달의 '열쇠 구멍을 통해'와 같이 장르를 가리지 않는 서평을 만날 수 있다. 일부러 유명한 책을 옆으로 치워둔 것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다. 1970년 할리나 오가렉 최가 폴란드어로 번역해 출간한 책을 구해 읽은 시인은 "동아시아에서는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다"는 말로 이야기를 연다. 그가 읽은 춘향전은 용꿈을 꾼 16세 춘향이 양반 자제와 사랑에 빠지지만, 양반 자제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러 떠난 뒤 춘향이 탐욕스러운 늙은 관리에게 매질을 당하는 슬픈 이야기다. 작가는 쇠가 박힌 대나무 몽둥이가 그녀의 작고 여린 발바닥을 부서트리는 장면에 탄식하며 춘향의 여린 발을 걱정하기도 한다.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춘향의 발꿈치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

이 보기 드문 책을 통해 시인이 살바도르 달리보다 르네 마그리트를 좋아하고, 새와 고양이를 사랑하고, 오래된 영화를 즐겨 보고, 찰스 디킨스와 우디 앨런, 쇼팽, 엘라 피츠제럴드의 열혈 팬임을 알 수 있다. 스튜어트 니컬슨의 '엘라 피츠제럴드'를 읽은 경험은 그의 시 '엘라는 천국에' 속에 녹아들기도 했다.

시인의 독서법은 어땠을까. 심보르스카는 "내가 구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라면서 "무엇보다 몽테뉴가 주장한 것처럼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고 썼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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