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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항암치료 중단 시인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많아질 때 아름다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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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거주 허수경 시인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얼마 남지 않아…개정판 당부”

경향신문

독일에서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허수경 시인(54·사진)이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를 펴냈다. 2003년 펴낸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새롭게 편집한 개정판이다. 허 시인은 후배 시인 김민정 난다 대표에게 암투병을 알리면서 자신의 글을 다시 책으로 펴낼 것을 당부했다. 김 시인은 “지난 2월 허 시인의 위암이 전이돼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며 “허 시인이 자신이 냈던 책들 가운데 네 권을 다시 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오래전 쓴 글을 다시 편집한 것이지만, 책에는 머나먼 타국에서 죽음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황홀하고, 외로운, 이 나비 같은 시간들.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 이 책은 그 아름다움을 닮으려 한 기록이다.” 병상에서 쓰였을 책의 서문에서 시인은 이같이 말한다.

경향신문

1992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공부한 시인은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인 지도교수와 결혼하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국어로 된 시집과 산문집 등을 꾸준히 펴내왔다. 산문집엔 고국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그리움이 담겼다. 시인은 고향 음식을 먹고 싶어 깻잎 등을 정원에 심었다가 우박이 내리자 울면서 말한다. “이곳에서 사는 게 다 꿈이었고, 그곳으로 가는 것도 다 꿈이었다. 붙잡힌 영혼이여, 몸이 무거운가. 왜 이곳에서 그곳으로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가.”

시인의 영혼을 붙잡은 것은 고대의 문명이다. 4000년 전 쓰인 문자를 해독하고 땡볕에서 수몰 직전인 유프라테스 문명의 유물을 발굴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회의한다. 중동과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등을 접하면서 그는 “죽은 언어를 해독하는 일은 우리에게 어떠한 현실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언어를 배워서 그 당시의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한들, 그때를 살아가던 사람들을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하겠나”라고 한다.

산문집에선 유럽의 극우화, 이주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는데, 이 시선은 우리 사회 내부를 찌르는 말이기도 하다.

허 시인은 독일로 찾아가겠다는 김 시인을 한사코 말렸다. “몸이 종이처럼 구겨져서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허 시인과 종종 통화하는 김 시인은 “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항암치료를 중단했다고 전해왔다”며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동화 <가로메와 늘메 이야기>, 발굴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를 다시 펴낼 것을 당부했다”고 전했다.

“말을 하는 근원을 나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날, 그리고 그 새로운 언어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날, 나는 내 코끝으로 스치던 냄새들을 새로운 말로 적을 수 있으리라. 그때면, 나는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으리.”

2011년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장편소설 <박하>를 내고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허 시인을 만났을 때, 구수한 진주 사투리를 쓰던 그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앞으로 좀 더 한국을 자주 찾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한국을 찾지 못했다. 시인은 아직도, 마지막까지 여행 중이다.

“어디 그 사무친 것이 있다고 믿었기에 길을 나서서는 오래 집으로 가지 않는가. 그리고 여전히 물 한가운데에 있는가……나의 여행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여행인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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