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3 (목)

목숨 달렸는데, 구급차 사고나면 성과급 깎는다는 소방청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기가 동전을 삼켰어요."
긴급상황이었다. 동전이 아기의 기도(氣道)를 막아 호흡이 불안정했던 상황. 서울 지역 119안전센터 김민성(가명)소방관은 구급차 가속페달을 깊숙이 밟았다. 정지신호에 걸렸다. 김 소방관은 구급차 안전운행 표준지침에 따라 교차로에서 사이렌을 켠 채 정지해서 멈춘 뒤, 전방과 좌우를 살피며 전진했다. 빨간 불에서 달린 것이다. 이 때 도로 한 구석에서 오토바이가 구급차를 들이받았다.

소방청의 안전운행 표준지침대로 운전했지만 김 소방관 과실이 100%였다. 신호위반을 했기 때문이다. 김 소방관은 벌금 7만원과 벌점 15점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김 소방관은 구급차 운전을 기피하게 됐다. "화재진압, 응급환자 이송 등 골든타임이 중요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가야합니다. 이 때 사고 책임은 소방관이 다 뒤집어 씁니다. 환자는 숨 넘어가는데 천천히 운전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입니다."

조선일보

서울의 한 도로에서 소방차들이 ‘소방차 길 터주기 훈련’을 하고 있다. 승용차들이 길을 비켜주는 대신 소방차를 추월하고 있다./조선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교통사고 내면 성과급 불이익?…운전습관 기록 논란도
소방차(펌프, 구급, 구조차 포함) 교통사고가 매년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소방차 교통사고는 555건, 2016년 416건보다 33.4% 늘었다. ‘119 구급대 구급차 교통사고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구급차의 대당 사고율은 24.3%, 이는 국내 등록 자동차의 사고율 0.8%보다 약 30배 높은 수준. 일반 차량보다 구급차가 교통사고에 많이 노출돼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방청은 구급차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지난 6월 ‘2018년 구급차 교통사고 제로화 대책’을 마련, 시행을 예고했다. 일선 소방서에는 앞으로 이 대책이 향후 시행될 것이라는 공문만 내려간 상태다.

소방청의 구급차 교통사고 제로화 대책에 따르면 △구급차·소방차 운전을 하다 3번째 교통사고를 낸 소방대원의 성과급을 깎고 △3년간 세 차례 이상 교통사고를 낸 경우에는 징계 처분하는 내용이 골자다 무(無)사고 소방관은 5년·10년마다 표창수여, 특별휴가, 국내외 연수 등을 주는 유인책도 있다.

조선일보

지난해충북 제천 하소동 스포츠센터(오른쪽 검게 그을린 건물) 인근 왕복 2차선 도로 양편에 불법 주차한 차들이 늘어서 있다. 불법 주차 차량 탓에 소방차 진입이 늦어져 화재 당시 인명 피해가 컸다. /남강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직 검토 단계지만,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에서는 일선 소방관들의 사기를 꺾는 정책이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서울지역에 근무하는 A(35) 소방관은 "현장을 모르고 책상에서 볼펜 굴리는 분들 생각"이라며 "사고 나면 전부 소방대원 잘못이고 인사 불이익까지 준다는데, 지금 현장에서는 구급차·소방차 운전대 잡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운행기록장치를 사용해 소방·구급차 운전자의 운전습관을 저장·분석하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소방청은 운행기록장치를 활용해 차량속도, RPM, 브레이크 작동 등 운행정보를 기록, 평소 운전원의 과속 등 운전습관을 모니터링·분석해 교육 등에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충북지역 일선 소방서 소방관은 "1분, 1초를 다투는 생사의 길에서 사람은 살리지만, 과속은 하지 말라는 주장이 말이 안된다"며 "운전습관까지 테스트받고 기록되는 상황이라 현장에서는 환자보다는 내 처지나 잘챙기자 식의 얘기도 나온다"고 했다.

◇ 연간 2352건 골목길 불법주차 차량에 긁혀도 소방관 책임
낮 최고기온이 35도였던 지난 10일, 서울 지역의 한 소방서의 살수차가 쪽방촌으로 출동했다. 지역 서비스 차원이었다. 당시 소방차를 운전하던 B소방관은 운전대를 조작하다가 불법 주차된 승용차의 범퍼를 긁었다. 소방청은 이 교통사고의 책임을 물었고, B소방관은 휴일을 쪼개 도로교통공단에서 4시간 교통교육을 받았다.

지난 3월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구급차가 사이렌을 켜고 중앙선을 넘다가 불법 유턴 차량에 부딪힌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사고를 낸 소방관들은 소방서 자체 안전교육 30분을 받는다. 추가로 휴일에는 도로교통공단을 찾아 4시간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두번째 사고라면 서장과 면담도 해야한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방청에 따르면 2013~2017년 5년간 발생한 소방차(구급차 포함) 교통사고는 2352건이다. 가장 큰 사고 원인은 운전 부주의로, 전체 사고의 59.5%(1400건)에 해당한다. 운전 부주의 항목에는 소방차 진입 시 불법 주차 차량에 긁히거나, 다급한 상황에서 구조물 등과 접촉한 경우도 모두 포함된다. 여기에 신호위반 309건(13.1%), 차선변경 231건(9.8%) 등이 뒤를 이었다. 사고장소는 전체 사고의 총 51.3%가 교차로와 골목길에서 발생했다.

골목길 불법주차가 큰 인명피해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9명이 숨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소방차량은 신고 7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불법 주정차으로 인해 30여분간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 사이 유독가스를 마신 피해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강원도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은 "전복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면 운전사들이 현장 출동에 위축될 수 밖에 없다" 5년, 10년 무사고 경력이라면, 운전 솜씨가 좋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만큼 운전자들이 소극적, 방어적으로 대응했다는 얘기다. 이게 칭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불법 주차된 BMW를 박살낸 소방차…소방관 "韓에서 불가능한 얘기"
전문가들은 구급차·소방차를 배려하는 사회분위기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사고의 경우는 질책하지 않는 소방청 내부 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소방관이 사고를 냈다면 징계보다는 격려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면서 "질책이 계속되면 자칫 자율적인 ‘봉사정신’이 필요한 소방 조직의 분위기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좁은 도로에 불법주차된 차량을 무자비하게 밀고 가는 캐나다 소방관 화재 출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캐나다 소방차의 존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동영상은 2014년 캐나다 올드 몬트리올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다. 소방차가 골목에 들어섰지만, 먼저 도착한 경찰차와 불법 주차된 차량으로 진입이 힘든 상황. 소방차는 망설이지 않고 속도를 내서 차량을 밀쳤고, 이 과정에서 BMW 승용차의 범퍼가 떨어져 나갔다.
우리나라도 법률상으로는 화재 진압 시 불법 주차 차량을 제거 또는 이동시키고 도로에 진입할 수 있게 돼있다. 하지만 소방관이 책임을 직접 지게 하는 경우가 많아 현실적으로 캐나다 소방관처럼 대응하기 어렵다.

미국, 캐나다,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원활한 화재 진압을 위해 긴급차량의 출동로 확보를 법적으로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소방차전용구간을 지정하고 이 구간에 불법 주정차한 차량은 일반 범칙금에 수배를 부과한다. 경찰이나 소방관이 일일이 단속할 수 없다보니 미국은 아예 민간업체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불법 주정차 차량을 적발하고 있다.

구급차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차량에 대해서 오스트리아는 최대 2180유로, 독일의 경우에는 최소 1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해, 우리나라보다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다.

강원도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은 "동영상을 봤고 한때 소방관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가 됐다"며 "단언컨대,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같은 얘기나 불가능 일이라고 생각한다. BMW 범퍼면 수리비만해도 수백원만이고 차주의 민원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오로지 시민을 구하러 외제차를 부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했다.



[고성민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