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에게 침묵 강요한 꼴…대법 판례 흐름에 역행”
김지은씨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고 진실 밝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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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 한국 최초의 성희롱 사건보다 후퇴한 판결이다.”
수행비서 김지은씨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14일 무죄가 선고되자 여성계는 크게 반발했다.
올해 초 서지현 검사의 ‘권력형 성폭력 폭로’ 이후 확산된 ‘미투(#MeToo)’ 운동과 관련한 법원의 첫 판결에서부터 ‘업무상 위력’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자 여성계는 “무수한 ‘위력 성폭력’에 대한 허용 면허냐”며 비판했다.
여성단체들로 구성된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오전 안 전 지사의 선고공판이 열린 뒤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1심 판결을 규탄했다. 이들은 “법원이 성폭력 사건의 강력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하고 여전히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을 엄격하고 좁게 해석했다”면서 “성폭력이 발생한 공간에서의 유형력 행사에만 초점을 맞춘 좁은 해석과 판단은 강간에 대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을 두루 살피는 최근 대법원 판례의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책위는 이날 판결이 비슷한 유형의 권력형 성범죄에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들은 “온갖 영향력을 행사해 괴롭히는 상사들은 이제 (성폭력) ‘허용 면허’를 갖게 된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성폭력을 인지하고, 사회에 알리기까지 수백번 고민할 피해자들에게 이 판결은 ‘침묵에 대한 강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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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변호인인 정혜선 변호사는 “피해자가 지난 3월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언한 뒤 5개월간 피고인의 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기억하기를 반복했지만, 이런 피해자의 진술을 재판부가 너무도 쉽게 배척했다”며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의 특성이나 사회적 의미와 무게감에 대한 이해 없이 너무도 쉽게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는 “권세나 지위를 가진 사람이 소위 말하는 ‘갑질’을 성적으로 휘두르는 것을 법원이 인정한 격”이라며 “미투 운동을 위축시키고, 판결을 기다린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킨 꼴”이라고 말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씨는 국내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관련 판결이었던 1994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 판결을 언급하면서 “현실을 읽는 해석이라도 한 24년 전 판결보다 훨씬 후퇴한 최악의 판결”이라며 “재판부는 단 한 줄도 현실을 반영하거나 의미를 읽지 못했고,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판결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변호인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며 “이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제가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약자가 힘에 겨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세상이 아니라, 당당히 끝까지 살아남아 진실을 밝혀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초석이 되도록 다시 힘을 낼 것”이라고 했다.
대책위는 “1심 판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미 있고 정의로운 사법부의 다음 판결을 기다린다”며 항소심에서도 법적 대응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등은 이날 오후 7시쯤부터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무죄 선고를 규탄하는 항의 행동을 벌였다.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2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다섯 번째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를 연다고 밝혔다.
불법촬영 등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여성 시위가 이번 무죄 판결로 더욱 확산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해당 시위를 주도해온 온라인 커뮤니티 ‘불편한 용기’ 등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무죄 판결에 분노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전날 ‘홍익대 미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의 여성 가해자가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부산지법에서 성관계 도중 연인의 나체 사진을 찍어 ‘일간베스트저장소’에 올린 남성 피의자에게는 벌금 2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이 나오자 ‘편파 수사’에 이은 ‘편파 판결’ 논란이 이어졌다.
<선명수·전현진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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