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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세상 읽기] 절박함과 절박함이 충돌할 때 / 홍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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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갑질에 맞서 마스크를 쓰고 매주 열리는 집회,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내던지는 오체투지 행진, 계엄령 검토 문건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과 사법행정권 남용에 항의하는 농성단, 불법촬영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며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여성들, 성폭력에 맞선 미투의 물결들…. 이러한 정당한 요구들이 늘 품위 있고 세련되게만 발화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친 언사가 난무하고 책임자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쏟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두고 ‘혐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절박하게 외치는 저항의 목소리를 정제하라는 요구야말로 여유로운 강자의 관점일 테다. 혐오는 ‘강도’가 아니라 ‘방향’을 말한다. 책임을 져야 할 권력자와 그 공범들을 아무리 강도 높게 비난한들 그것을 혐오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그 분노가 한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를 향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에 대한 집단적 차별을 조장하거나 강화한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소수자 혐오는 종종 순화된 표현으로 에둘러 말해지거나 정책 제안으로 위장되기도 하고, “너희들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며 경계심을 풀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표현의 수위나 강도와는 무관하게, 어떤 소수자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거나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혐오의 범주에 포함된다.

실제로 이유 있는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니, 정당한 분노가 엉뚱한 희생양을 찾는 것이야말로 혐오가 확산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치의 선동은 패전과 경제 추락의 책임을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소수종교 신도, 소수민족, 정치적 반대자 등 당대의 소수자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집단학살인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구도로 벌어지는 사례들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주노동자들을 증오하거나, 사회 불안의 원인을 특정 종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이미 서구사회에서 흔한 일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어떤 남성들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에 분노하며, 여성이나 페미니즘에 그 책임을 묻는다. 최근에는 안전한 사회를 바란다며 난민이나 이주자에 반대하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안보 위기와 세금폭탄을 들먹이며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 안정된 사회복지, 국가안보와 안전한 사회에 대한 요구가 정당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화살이 여성, 동성애자, 난민 등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소수자들에게 향하는 순간, 그 정당성의 기반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방법이 과격하거나 요구가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혐오다.

고도성장이 끝난 후 개인들의 지위는 점점 취약해지고 사회 안전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권리 투쟁이 격화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절박한 투쟁이 또 다른 절박한 이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지만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한다. 페미니즘과 여성을 공격한다고 남성들의 사회경제적 위기가 해소될 리 없다.

구조적인 사회 불안의 문제가 난민 유입을 막는다고 해결될 수 없고, 이주노동자들을 추방한다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날 리도 만무하다. 더 큰 문제는 절박함과 절박함이 충돌하는 가운데,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망각하게 되고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가 바로 이 부당한 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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