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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쌍용차 폭력진압’ 9년…해고 노동자들은 절실해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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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쌍용차 노조 김선동 조직실장·윤충열 수석부지부장 인터뷰

마지막 복직대기자 120명은 왜 쌍용차 복직을 포기하지 못했나

정치권과 쌍용차의 ‘희망고문’…“우린 절실해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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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5일. 그날 아침도 햇빛이 눈부시다 못해 따가운 날이었다. 그날 남자는 철판으로 된 공장 지붕 위를 달리고, 또 달려 도망쳤다. 그의 뒤에선 무장을 한 경찰이 국네 앰네스티가 사용을 금지한 전기충격기 ‘테이저건’을 쏘아대며 쫓아오고 있었다. 특공대의 공격을 피해 달려가던 남자는 지붕 턱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순식간에 수없이 많은 군홧발이, 방패가, 곤봉이 엎드린 채 웅크린 그의 몸을 수직으로 내리 찍었다.

하늘에선 물 덩어리가 쏟아지면서 분무가 되어 퍼졌다. 햇빛이 있었는데? 그 물 덩어리는 경찰 헬기가 옥상에서 저항하는 남자들에게 투하한 최루액 봉투였다. 경찰특공대에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이들은 화염병 등을 던지며 경찰의 공장 진입을 막으려 했다. 공장 곳곳에선 불길이 솟았다. 소방헬기가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검은 연기는 1시간여 동안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전쟁터’. 그날 빛이 바랜 녹색 지붕 위의 풍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그 말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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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정확히 9년 뒤인 2018년 8월5일 오후. 9년 전 그날처럼 햇빛이 따가웠던 이날, 서울 덕수궁 돌담길 주변 한 순대국집에 들어선 김선동(50)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직실장은 에어컨 바람을 쐬자마자 입고 있던 조끼부터 벗어던졌다. 낮 최고 기온은 35도.

“그래도 이게 우리 얼굴 아니냐, 얼굴. 얇은 걸로 맞췄어야 했는데….”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나일론 소재의 까만색 조끼에는 ‘끝낸다 해고’라는 그의 다짐이 붉게 쓰여 있다. 5일은 지난 6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48)씨의 분향소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지 34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경찰특공대가 2009년 8월5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옥쇄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폭력진압한 지 만 9년 되는 날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영상] 쌍용차 ‘국가폭력’ 9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폭염 속 분향소에 상주하는 노조 간부 4명과 조합원, 이곳을 찾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도구는 선풍기 4대뿐. 이따금 분향소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이 아이스크림과 자두 같은 과일 등을 전해주곤 갔다. 날 더운데 목이나 축이라며 김선동 조직실장이 건넨 차가운 사과즙은 5분도 채 안 돼 뜨뜻미지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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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009년에는 77일(옥쇄파업 기간)간 비가 안 왔다니까요. 그때 한 방울도 비가 안 와 가지고…. 주중이가 이렇게 돼서 분향소 설치하니까 또 몇십 년만에 폭염이 오고. 뭔 큰 일 치를 때마다 비가 안 와. 지금은 (천막) 그늘이라도 있죠. 그때(2009년 옥쇄파업 당시)는 아침부터 옥상에 뜨거운 상철판 위에 올라가서 계속 긴장하고 근무를 섰어요. 경찰들 올라올까봐.”

그는 올 여름 사상 최악의 폭염이 꼭 자신들의 일 때문에 찾아온 것만 같다. 지난달 3일 분향소 설치 뒤 이틀가량 벌어졌던 보수단체와의 충돌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지금도 주말이면 광화문에서 집회를 마친 태극기 부대 회원 500여명이 대한문 앞으로 몰려와 쌍용차 분향소 옆에서 소란스러운 집회를 벌인다. 윤충열(49) 수석부지부장은 최근 분향소를 찾아왔던 보수단체 회원들과의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했다.



“분향소에 와서 함께 (연대)해주시는 단체 관계자 분들이 점심이나 저녁 때 밥을 많이 사주세요. 그걸 보고 옆에 태극기 부대 할배들이 그래요. ‘문재인 대통령이 돼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돈도 빵빵하고, 임종석(대통령 비서실장)이 시켜서 우리(보수단체) 쫓아내려고 분향소 거짓으로 차린 거 아니냐’라고. 보수단체 회원들이 일당 받고 관제데모 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지금은 돈줄이 끊겼지만. 그러니까 이 분들은 그 돈이 저희한테 오는 줄 아시는 거예요. 저희한테 ‘(하루) 얼마 받냐’고 물으세요.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잘 (대화가) 안 됐죠. 근데 요즘은 여기 늘 계시는 분들은 저희 다 이해하세요. 낮에는 저희더러 ‘빨갱이’라고 소리 치시다가 저녁 때 돌아갈 때쯤엔 ‘진짜 동료를 추모하고 있었던 건지 몰랐다. 미안하다’라고 사과하고 가는 분들도 계세요. (웃음)” -윤충열 수석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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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투쟁 9년.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2009년 파업 이후 ‘강성노조’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그 전까진 금속노조 산하 다른 사업장과 비교할 때 힘 없는 ‘변두리 노조’에 불과했다. 지난 9년 간의 쌍용차 투쟁이 더욱 놀랍고 이례적인 일로 여겨지는 이유다. 김선동 조직실장 말대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도 신기해할 따름”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9년이란 시간 동안 전 직장에 복직하겠다고 싸우는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경영진의 잘못으로 회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됐고, 이로 인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9년 동안의 싸움은 쉽지 않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와 싸우는 쪽보다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새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다른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일까.



“(2009년에) 파업 끝나고 왜 저희한테 바로 ‘살 길’ 못 찾았냐고 말하는데, 회사에선 해고됐지만, 6개월 동안 경찰 조사를 받느라 ‘쌍용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60여명이 구속됐고, 파업에 참가했던 300명 가까이가 경찰서 들락날락하며 조사를 받았죠. 그때 조합원들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벗어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었어요. 왜? 경찰에서 계속 부르고, 언제 구속될지 모르니까. 어떤 친구(조합원)들은 둘이 손잡고 조사 받으러 가서 먼저 끝난 친구가 기다려 주기로 했는데, 그냥 가버렸어요. 왜 갔는지 아세요? 경찰이 ‘(파업 참가자) 한 명만 (이름을) 대. 그럼 (구속 안 되게) 빼줄게’라고 하니까 자기가 구속될까봐 같이 손잡고 갔던 친구를 지목한 거예요. 그 다음에 다른 친구가 조사 들어가면 경찰이 ‘방금 전 나간 애가 당신 봤대. 대질해줄까?’ 이런 식이었던 거죠. 그래서 (배신감에) 약을 먹은 사람도 있다니까요. 반대로 친구 이름을 말한 게 너무 후회되고, 미안해서 또 죽으려고 한 사람도 있고… -김선동 조직실장-

김선동 조직실장은 그 무렵 일자리를 잃은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모였던 이유는 “다시 투쟁해서 복직하자는 게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100명 넘는 조합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어제 조사에서 새로운 얘기가 나왔나?’, ‘어떻게 조사를 받았나?’ 등 자신의 구속 가능성을 알아보기 바빴다”며 “경찰 조사가 6개월이나 이어지는 동안 조합원들에게 생계를 신경 쓸 여유같은 건 없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왜 아직도 싸우고 있느냐’란 물음에 윤충열 수석부지부장은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는 게 첫 번째 마음”이라고 말했다. 2009년 8월 쌍용차 파업이 종료된 직후 검찰은 ‘용공성 짙은 외부세력이 농성에 개입한 정황이 있다’며 쌍용차 파업에 ‘색깔론’을 덧씌웠다.

“쌍용차 정리해고는 내 잘못이 아니라 상하이차의 (먹튀) 문제로 벌어진 일인데, 억울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도’, ‘빨갱이’라는 얘길 들었어요. 아이들한테 ‘아빠가 잘못해서 해고된 게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죠. 그래서 해고무효확인 소송, 복직투쟁에 나섰던 거고.”

그 결과 쌍용차 노동자들은 파업이 끝난 뒤에도 3~4년간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 때문에 취업이 불가능했다. 이력서를 낸 회사에선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또 파업하는 거 아니냐’란 불신의 눈초리가 돌아왔다. 사실상 ‘다른 회사에 취업을 안 했던 게 아니라, 못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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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폭력진압에 따른 후유증, 해고로 인한 생활고 외에 이들을 더 아프게 만든 상처는 ‘사람‘이었다. 경찰특공대의 폭력진압 상황이 텔레비전 뉴스로 생중계되자 파업 참여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은 이들에게 ‘제발 살아서만 돌아와 달라’고 문자메시지 등을 보내며 애원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자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주변의 관심은 이내 냉담한 태도로 바뀌었다. “이미 끝났잖아. 복직은 뭘…”, “(노조) 근처에 가지도 마. 먹고 살 길 찾아야지.” 같은 말들이 파업에 참여했던 해고 노동자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경찰에 의한 무자비한 폭력,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상실감, 그 뒤 이어지는 경제적 빈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이들에게 돌아온 건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다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비난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은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졌다.



“평택이란 동네는 도농복합지역이에요. 공장은 많지만, 농촌처럼 한 다리 건너면 다 학교 선후배 사이라서 쌍용차 노동자들은 서로가 아버지 친구 아들, 사촌·팔촌, 사돈 관계란 말이에요. 나는 사돈 청년하고 같은 공장에서 일했는데, 내가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니까 그 친구는 미안한 마음에 내가 있는 쪽으로 오지도 못하고 다른 출입구로 돌아서 들어오고 그랬어요. 해고자 가족은 다를까요? (해고자) 부인이 동창회를 나갔어요. 그런데 한 동네에서 뻔히 사정 아는 선후배들이 ‘너희 신랑은 왜 (파업에) 앞장섰니?’, ‘(감옥에) 왜 들어갔대?’ 그런 말을 듣는데, 거기서부터 (관계가) 단절인 거야. 생계가 어려우니까 어디 가서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누구 와이프가 식당에서 일하더라’ 수군대고. 사회적인 감옥에 갇히는 거죠. 거미가 촘촘히 쳐놓은 그물에 걸린 것처럼…. 그건 본인들 힘으로는 못 나와요. 누군가가 도와줘야지. 그게 복직인거고요.” -김선동 조직실장-

“평택 아이들은 상처가 굉장히 많아요. 같은 학교에서도 어떤 애 아빠는 해고가 안 됐고, 어떤 애 아빠는 해고됐고. ‘(쌍용차) 파업하는 아빠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한 교사도 있었고. 그래서 아이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죠. 단순히 정리해고 문제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파괴됐던 거니까 (해고 문제가) 더 큰 상처로 오는 거죠.” -윤충열 수석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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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9년 동안 복직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정치권과 쌍용차의 ‘희망고문’이었다. 그 야속한 희망이 복직을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해고 노동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희망은 계속 있었죠. (상황이) 복직할 것 같이 됐잖아요. 2012년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을 때 국민들이 응원해줬고, 대선 땐 당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쌍용차 해고 잘못됐다’며 분향소를 찾아왔어요. 2014년 2월엔 고등법원 판결(쌍용차의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판결)도 이겼잖아요. 9개월 만에 양승태 대법원에서 뒤집어 버렸지만. 우리 집사람이 그런 얘길 해요. (복직) 안될 것 같으면 안 되겠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 준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키든지. 지금 쌍용차 잘 나가잖아요. 티볼리, 지포(G4) 렉스턴 차를 내놓을 때마다 히트를 쳤는데 어떻게 회사가 적자를 내는지 나는 이해가 안 돼요.” -윤충열 수석부지부장-

2015년 12월30일 쌍용차 노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정리해고 및 징계해고 노동자 전원 복직 노력”을 합의했다. 노사 합의로 인해 생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2009년 이후 이어졌던 죽음의 행렬을 1년5개월 간이나마 멈춰 세웠다. 그러나 회사가 약속했던 전원 복직 시기(2017년 상반기)를 한 달 앞둔 2017년 5월, 해고 노동자의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1년1개월 뒤인 지난 6월, 이들이 5년 만에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하게 된 30번째 죽음이 찾아왔다. 동료들은 “회사가 복직 시한만이라도 알려줬다면 그가 목숨을 끊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쌍용차 30번째 사망자, 그가 남긴 마지막 말) 현재 해고자 중 복직 희망자 167명(2명 사망) 가운데 공장에 돌아간 이들은 45명. 아직 120명의 복직 대기자가 남아있다.

윤충열 수석부지부장은 최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의혹 사건 중 2014년 11월 쌍용차 정리해고 파기환송 판결(▶관련 기사: “희망이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탄식 속 말 못 이어)이 포함된 데 대해 “9개월 만에 원심을 뒤집고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와 그땐 전관예우(당시 쌍용차 변호인단에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 2명이 참여)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며 “거기에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까지 관련됐으니 (당시 대법원은) 얼마나 쉽게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을까란 생각이 든다”고 허탈해했다.

지난달엔 인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쌍용차 대주주인 아난드 마힌드라 인도 마힌드라그룹 회장을 만나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문 대통령, 마힌드라 회장 만나 “쌍용차 해고자 복직 관심 가져달라”) 이 자리에서 마힌드라 회장은 “현장에 있는 저희 경영진이 노사 간에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갈 것으로 생각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래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더 속이 탄다.

“(2012년) 대선 후보 때 ‘대통령 되면 (쌍용차 해고자 문제) 해결하겠다’고 했잖아요. 자신할 수 없으면 차라리 약속을 하지 말든가.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와서 눈물 흘리며 손 잡아줬으면 그 약속을 꼭 지키든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오지를 말든가.”

김선동 조직실장은 ‘우리는 절실해서 위험하다‘는 말로 수 년간 반복됐던 희망고문에 지친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달 케이티엑스(KTX) 승무원들의 복직 결정을 보며 “우리도 어느 날 상황이 급진전 돼 복직된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란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조합원들의 마음이 (복직에 대해) 너무 절실한 만큼 그 기대가 잘못될 경우 또 다시 희망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희망고문은) 위험하다”고 조심스러워 했다.



“복직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거 거든요. 그냥 다시 공장 들어가서 일하는 건데…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이 그랬대요. ‘(코레일) 사장이 싸인할 때까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되고 나니까 이게 뭔가 싶더라’라고. 복직… 그냥 종이 쪼가리(싸인)인데…” -김선동 조직실장-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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