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리용호 기념촬영 때 반가운 '조우'…기자회견·연설 때 날선 '신경전'
WP "악수와 잽 번갈아 주고받아"…대화 끈 유지하며 기싸움 계속될듯
싱가포르서 만나 악수하는 북미외교장관 |
(워싱턴=연합뉴스) 송수경 특파원 = 4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는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 북미간 핵(核) 협상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역내 최대의 다자안보무대에 자리를 같이한 양측의 외교수장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한편으로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다른 한편으로는 첨예한 입장차를 드러내며 날 선 신경전을 주고받았다. 한마디로 북미간 핵협상을 둘러싼 강온 양면의 기류가 동시에 교차한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 CBS 방송은 4일 "북미의 최고 외교관들이 정치적 수사와 함께 신랄한 설전을 주고받으면서 롤러코스터 핵외교가 고점과 저점을 오갔다"며 "이는 북한 비핵화 노력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북미 외교관들, 악수와 잽을 주고받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미가 악수와 상대를 향한 비판을 번갈아가며 했다면서 "평양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종식하기 위한 협상으로 가는 길에 놓인 또 하나의 장애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CNN방송은 "폼페이오 장관과 리 외무상의 '친근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기 위한 경제 제재를 둘러싸고 북미 간 계속되는 긴장의 신호들이 감지됐다"고 전했다.
일단 대표적 의전절차인 기념촬영 행사에서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리 외무상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기념촬영 후에는 북미 실무협상을 이끌어온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가 리 외무상에게 다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던 친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답신을 전달했다.
그러나 대북제재 문제 등을 놓고는 '시간차 충돌'이 빚어졌다. 폼페이오 장관이 오전 기자회견에서 대북제재 이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자 리 외무상이 오후 ARF 회의 연설에서 이를 맞받아친 것이다.
북미 정상 간 '친서 외교' 등을 통해 관계개선을 위한 대화의 끈을 이어가면서도 구체적 비핵화 로드맵을 놓고는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지는 상황의 단면을 보여준 하루였던 셈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폼페이오 장관이 대북제재 이행 문제를 '작심하고' 거론하면서 북한과 러시아, 중국을 동시에 겨눴다. 이는 북한이 유엔 제재를 피하기 위해 '선박 대 선박'으로 이뤄지는 석유제품 불법거래가 크게 늘어났다는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 보고서가 나온 시점과 맞물려 관심을 끌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시간표 내에 북한 비핵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하면서도 제재 위반 문제를 놓고 러시아를 향해 경고장을 날리고 "어떠한 위반이든 미국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제재 이행을 거듭 촉구했다. 중국을 향해서는 전날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의 회동 사실을 언급하며 "우리는 유엔 안보리 결의이행의 중요성을 논의했다"며 "중국이 지속해서 전념해나갈 것을 분명히 했다"고 강조했다.
앞서 폼페이오 장관은 전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비핵화 약속 이행과 아직은 거리가 먼 채로 여러 유엔 안보리 제재를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 측은 이번 ARF 회의를 대북제재 공조 강화를 위한 여론전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ARF 회의 기간 지난 2월 이후 5개월여 만에 독자 대북제재 카드를 뽑아들기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제재 관련 '강성 발언'이 있은 지 몇 시간 안 돼 두 사람은 회의장에서 조우 장면을 연출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WP는 전했다.
이들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폼페이오 장관이 "우리는 곧 다시 만나야 한다"고 말하자 리 외무상이 "동의한다. 해야 할 많은 건설적 대화가 있다"고 화답했다고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이 기자들에 전했다.
CNN방송에 따르면 나워트 대변인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악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두 나라(북미)가 1년 전 어땠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언제라도 그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하나의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이 각자 자리로 돌아간 뒤 김 대사가 리 외무상에게 다가가 서류봉투를 전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이후 폼페이오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김 대사 편에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리 외무상에 전달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 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일(미국 현지시간) 김정은 위원장에게서 받은 친서에 대한 답신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리 외무상과) 짧게 정중한 인사를 나눴다"며 "우리 대표단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답신을 전달할 기회를 가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폼페이오 장관이 다음 행선지인 인도네시아로 떠나자마자 리 외무상은 ARF 회의 연설에서 미국을 날카롭게 공격했다고 WP는 전했다.
리 외무상은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해 우리가 핵시험과 로켓 발사시험 중지, 핵시험장 폐기 등 주동적으로 먼저 취한 선의의 조치들에 대한 화답은커녕 미국에서는 오히려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 외무상은 이어 "국제사회는 응당 우리가 비핵화를 위해 먼저 취한 선의의 조치들에 조선반도의 평화보장과 경제발전을 고무 추동하는 건설적 조치들로 화답해 나서야 할 것"이라고 언급, 제재 완화를 촉구했다는 분석을 낳았다.
이 장면을 두고 WP는 지난달 6∼7일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당시 '생산적 대화가 이뤄졌다'는 폼페이오 장관의 설명과 달리 그가 평양을 떠난 직후 북한이 외무성 담화를 통해 "미국이 강도적 요구를 한다"고 비난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이번 회의 기간 비핵화와 체제보장의 '선후관계'를 둘러싼 북미 간 입장차가 재확인됨에 따라 이후 협상 국면에서도 힘겨루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제재는 유지될 것이라며 '선(先) 비핵화-후(後) 제재 완화' 입장을 견지한 반면 리 외무상은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동시적·단계적 이행을 거듭 촉구했다.
WP는 "양측의 불협화음은 북한의 핵무기 해체에 대한 보상의 속도를 양측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간극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며 "미국은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제재가 유지되길 바라고 있지만, 북한은 선의의 표시 차원에서 여러 단계에 걸쳐 제재가 완화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hanks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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