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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폭염의 긍정효과 "주폭마저 더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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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의 긍정효과?
범죄 줄고, 모기는 비실비실
모처럼 거실에 가족이 모였다

곳곳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온다. 올 여름, 1907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면서 온열질환자는 3000명에 육박하고, 농작물 가격도 출렁인다. ‘심야(深夜)정전’으로 아파트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의외의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범죄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선 경찰관들은 ‘폭염 긍정효과’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한다. “주폭(酒暴)도 더위 먹었다”는 것이다.

①“주폭도 더위 먹었다” 112신고가 줄어
지난 2일 만난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 관계자는 “너무 더우니까 출동빈도가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주폭이 한 달 전보다 30%는 줄어든 것 같아요. 이렇게 더우니 취객이 많이 모이는 ‘건대 맛의 거리’에도 사람이 없네요. 더우니까 주폭들이 시비 걸기도 귀찮아졌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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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40도에 육박하는 폭염, 밤엔 30도가 넘는 초(超)열대야가 반복되면서 112 신고건수가 줄었다. ‘살인적인 더위’ 탓에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는 까닭이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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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경찰들 사이에서는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엔 시비로 인한 사건·사고가 늘어난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낮에는 40도에 육박하는 폭염, 밤엔 30도가 넘는 초(超)열대야가 반복되면서 이런 상식도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서 시빗거리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폭염이 시작된 7월 11일부터 25일까지 전국에서 집계된 112신고는 총 85만124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2만7263건) 줄었다. 같은 기간 평균 기온은 28.4도로 예년보다 1.4도 높았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활동이 가능한 더위에서는 불쾌지수로 인한 범죄율이 높아지지만, 요즘처럼 야외활동 자체가 어려운 폭염에서는 낯선 사람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다”면서 “대인관계로 인한 불편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범죄가 줄어드는 ‘나비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②그 많던 모기, 다 어디로 갔나
서울 양천구에 변모(34)씨는 올 여름을 앞두고 ‘모기 퇴치용품’을 대거 사들였다. 집 안에 신생아가 있기 때문이다. 모기장, 모기기피제, 모기약 세트까지 구비했지만 막상 쓸 일은 거의 없었다. 변씨는 “지난해에는 모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너무 고생했는데, 올해는 ‘웽’하는 모기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기는 작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전역 60개 유문등(誘蚊燈)에서 채집된 모기는 총 708마리.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56개소에서 채집한 1398마리의 절반 수준이다. 유문등은 모기가 좋아하는 푸른빛으로 모기를 유인하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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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의 경우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모기가 많으니 방역 해달라”는 민원이 139건 들어왔지만, 올해는 같은 기간 111건이 들어와 약 20% 감소했다. 중구도 지난해 5~7월에 비해 10% 넘게 줄었다.

전문가들은 ‘이상 고온’을 모기 개체 감소 이유로 든다. 섭씨 23~28도의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모기는 물웅덩이에 알을 낳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강한 직사광선이 모기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매일 같이 이어지면서 물웅덩이도 대부분 말라버렸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기온이 35도를 넘으면 모기 유충의 성장속도가 빨라지면서 성충의 수명이 짧아진다”며 “모기가 알을 낳을 수 있는 물웅덩이도 줄었다”고 설명했다.

계속되는 열대야(熱帶夜)영향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을 수밖에 없으니까 창문을 다 닫아놔요. 예년 같으면 웬만하면 창문을 열어 놓은 틈으로 모기가 들어왔는데 요즘엔 ‘원천봉쇄’된 셈입니다.” 직장인 김모(33)씨 얘기다.

이마트에 따르면 가장 더웠던 시기(7월16일~31일) 방충용품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25.8% 감소했다. 방충용품 가운데 모기약 매출은 18% 감소했다. 롯데슈퍼의 방충용품 매출도 전년보다 32% 줄어 들었다.
③폭염이 주는 ‘소소한 위안’
폭염이 주는 ‘소소한 위안’도 있다. ‘쌍둥이 아빠’ 권모(37)씨는 빨래가 잘 마르는 게 요즘 유일한 낙이다. 권씨는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하루에도 2~3번씩 세탁기를 돌리는데 널어놓으면 바로 바로 마르니 건조기 살 필요가 따로 없다면서 “그나마 빨래라도 잘 말라줘서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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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오모(47)씨는 “의도치 않게 집안에 이야기 꽃이 핀다”며 웃었다. 에어컨이 있는 거실로 사춘기 자녀가 모이는 것이다. “학교 다니는 딸이 방에 콕 처박혀서 뭐 하는지 몰랐는데, 요즘엔 온 식구가 저녁에 에어컨을 튼 거실로 다 나옵니다. 주말에도 친구 만나러 나가지 않네요. 이번 주말엔 온 가족이 모여 수박 먹었습니다. 폭염이 집안의 화목을 다져주는 셈입니다.” 오씨 얘기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든 가정도 있다. 더운 날씨로 집에서 요리하거나, 바깥에서 외식을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된 까닭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거주하는 주부 이송이(27) 씨는 “불 앞에서 저녁 하는 것도 일이라 요즘은 그냥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남편에게 퇴근할 때 포장해서 음식을 싸오라고 한다”며 “장보고, 설거지하는 수고를 던 것은 소소한 기쁨”이라고 말했다.

덩달아 배달음식도 ‘폭염특수’를 누리고 있다. 지난달 음식배달 전문업체 ‘배달의 민족’ 주문 수는 2000만여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두 배로 늘었다. 배달의 민족 관계자는 “회사 성장세가 빠른 영향도 있지만, 올 한해만 놓고 봐도 가장 더웠던 7월 넷째 주 주문량이 7월 둘째 주보다 17% 늘었다”면서 “더위로 인한 배달음식 주문이 더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④불경기 속 호황 “매출이 늘어난 원인은 폭염 하나 뿐”
불경기 속에서 폭염은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에어컨을 가동하는 대형마트·백화점으로 시민들이 ‘일단’ 몰리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역 롯데마트에서 만난 김진규(35)씨는 “잠시 더위 피하러 왔다가, 괜히 미안해서 음료수 몇 병 샀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웃었다. 신세계백화점은 폭염이 심해진 7월 16일부터 8월 1일까지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1% 늘었다. 롯데백화점도 같은 기간 매출이 작년보다 3.7% 늘었다. 특정 제품이 아니라 모든 상품이 두루두루 잘 팔렸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 얘기다. 신세계 관계자는 “불경기 속에서 매출이 늘어난 원인은 딱 하나 폭염 밖에 없다”며 “고객들이 일단 매장으로 들어오셨고, 방문한 김에 제품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냉방기기 판매도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물량이 달려서 설치까지는 지연될 수 있습니다.”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가전업체 판매점에서는 “에어컨을 지금 달라” “당장은 어렵다”는 대화가 종일 이어졌다.

에어컨 제조업체들은 올해 기록적인 폭염으로 국내 최대 판매량 기록(2017년 250만대)을 경신(更新)할 것으로 보고 있다. 폭염이 심해진 최근(7월16~31일) 롯데하이마트 에어컨 매출은 지난해 7월보다 75%나 뛰었다. 전자랜드프라이스킹 에어컨 판매량도 지난해 같은 기간(7월16~22일) 대비 31% 늘어났다.

[한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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