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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미군 유해 송환한 북한, 과연 ‘베트남의 길’ 반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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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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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인 7월27일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멋진 편지’도 함께 평양을 떠났다. 지난 1일(현지시각) 유해는 은빛 금속관에 실려 미 하와이 히캄기지에 도착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김 위원장에게 “감사한다. 당신이 이토록 친절한 행동을 취한 데 결코 놀라지 않는다. 곧 만나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가장 따뜻한 메시지 교환일 것이다.

북한의 미군 유해 송환 이후 이른바 ‘베트남의 길’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심심찮다. 유해 송환에서 출발해 제재 해제와 국교 수립에 이른 베트남의 경로가 북한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유해 송환이 지지부진한 비핵화 협상을 추동해 북-미관계 정상화 논의에 속도가 붙길 바라는 기대가 묻어 있다. 미국에선 베트남의 길을 축복인 양 내세우기도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베트남이 지나온 길을 북한이 따른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 송환 이후 베트남은 진짜로 ‘꽃길’을 걸은 것일까.

미국과 베트남의 수교협상은 또다른 전쟁이었다. 두 나라는 1977년 5월 첫 회담장에서부터 부닥쳤다. 미국은 전쟁 실종자 문제 해결을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다. 베트남은 전쟁보상금 지급을 먼저 약속하라고 되받았다. 패전국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성질이 난 미국 의회는 베트남 원조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협상이 파국에 이르자 베트남은 이듬해 6월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기구 ‘코메콘’에 들어가버렸다. 12월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루즈 정권을 축출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교협상 재개의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미군 유해 송환이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을 더욱 쪼들리게 했다. 베트남은 결국 실종자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미국의 선결조건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10월 미군 유해 5구가 미국으로 넘어갔다. 전쟁 이후 첫 송환이었다.

이후 수교협상은 미국의 일방적인 논리로 진행됐다. 미국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 개혁·개방정책 실시, 외국인 투자 보장, 정치범 석방 등 선결조건의 목록을 늘려갔다. 실종자 문제와 인권 문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한 베트남의 제안은 묵살했다. 베트남은 1989년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1991년엔 실종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사무소 설치를 허용하는 등 양보를 거듭했지만, 미국은 1995년 국교를 수립하기 전까지 강공으로 일관했다.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는 졌지만, 수교협상에서는 완승을 거뒀다.

미군 유해 송환 이후 펼쳐진 베트남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베트남의 전략적 선택과 인내가 없었다면 고비를 넘기 힘들었다. 베트남의 양보는 매번 더 큰 양보를 요구하는 미국의 벽에 부딪쳤다. 국제금융기구 가입, 무역금수 해제 등 베트남이 기대했던 미국의 상응조처는 계속 뒤로 밀렸다. 미국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베트남을 지원하도록 하려는 프랑스의 시도까지도 저지했다.

최근 베트남의 길에 올라탄 쪽은 오히려 미국이다. 미국은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북제재를 풀 수 없다고 공언한다. 유엔을 통해 대북제재를 준수하라는 주의보까지 내렸다. 남북협력 사업을 위한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한국의 요구에도 냉정하다.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비핵화 조처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며 선을 긋고 있다. 칠면조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오븐에서 꺼내선 안 된다는 식이다. 새로운 북-미관계 설정,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모두 비핵화 뒤로 넘긴 것이나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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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길에는 선비핵화를 요구하는 ‘리비아 모델’의 논리가 숨어 있다. 북한의 ‘친절함’이 요구하는 단계적이고 상호적인 비핵화 로드맵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은 이런 길을 결코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유강문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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