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
집에다가 ‘성학십도’ 병풍을 비치해 놓고 있다. 율곡학파는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병풍이었지만, 퇴계학파는 ‘성학십도’ 병풍을 지니는 것이 전통이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성학십도 병풍은 서예가의 손으로 쓴 붓글씨가 아니고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었던 성학십도 목판본에다가 먹물을 발라서 찍어낸 것이다.
퇴계학파는 아니지만 이 병풍을 거실에 쭉 펼쳐 놓고 있으면 문자의 향기가 서서히 집 안에 퍼지는 것 같다. 그 병풍 앞에 방석을 놓고 앉아 있으면 퇴계 선생의 '철학 그림'인 십도(十圖)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혼자서 차를 한잔 끓여 마시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릿속으로 들어온 그림들이 다시 아랫배로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한다. 그러면 만족감이 온다. '아! 나는 조선 유학의 전통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보수적 자존심이다.
이번에 한형조(60) 교수가 '성학십도' 해설서를 내놓았다. 퇴계가 평생 공부한 내용을 참기름 짜듯이 압축한 결과물이 성학십도라서, 일반인들은 그 내용과 맥락(context)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수재라고 소문난 한 교수가 성학십도를 떡갈비 만들 듯이 잘게 씹어서 책을 낸 것이다. '해묵은 사상이 현대의 우리에게 아무런 자양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이다.
'외래의 관점들이 본격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저 밀려왔다가 유행처럼 다시 썰물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무엇에 기초하여 문화적 이상을 세우고 문법을 만들어 갈 것인가!'는 탄식에 나도 아주 공감한다. 성학십도의 핵심은 9장 '경재잠(敬齋箴)'이다. 선비 정신의 핵심은 존중과 배려에 있다는 내용이다. 나와 타인,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 말이다.
그게 경(敬)이다. 지금도 88세 된 퇴계 종손은 종택을 찾아오는 10대 후반의 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항상 무릎을 꿇은 자세이다. 상대방에게는 편히 앉으라고 권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무릎 꿇는 자세가 평생 습관이 되어 익숙하다고 한다. 경재잠의 정신이 400년 넘게 그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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