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존 캐리루가 쓴 '나쁜 피(bad blood)'는 차세대 스티브 잡스라 불리던 여성 벤처기업가 엘리자베스 홈스의 벼락출세와 몰락을 다뤘다. 홈스는 스탠퍼드대를 중퇴한 뒤 테라노스라는 바이오 기업을 창업했고,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피 몇 방울로 200여 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기술로 실리콘밸리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기술이 불완전하고 과장됐다는 것이 이 책 저자의 탐사보도로 드러나면서 사기꾼으로 전락, 20년 형을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홈스는 스티브 잡스를 추앙했고 닮으려 했다. 그녀는 잡스를 흉내 내 검은 터틀넥을 즐겨 입었고, 잡스의 '현실왜곡장(동료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몰아붙여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하는 리더십)'에 비견할 설득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잡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잡스는 고객에게 약속부터 먼저 하지 않았다. 완성된 제품으로 고객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홈스는 약속부터 먼저 했고,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그 약속이 고객의 건강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었다.
잡스라면 결코 쓰레기를 소비자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장롱 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형편없이 만드는 것은 목수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홈스는 스스로 개발한 진단 장비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용화를 강행해 100만건 가까운 진단이 이뤄졌고, 적지 않은 사람이 잘못된 진단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홈스와 잡스 모두 신념이 강했다. 하지만 잡스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강력히 주장하는 직원과 격렬히 논쟁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존중할 줄도 알았다. 홈스는 많은 능력 있는 직원의 고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내쫓았고, 회사에 대해 말하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협박했다.
잡스는 직원들을 자발적으로 일하게 했지만, 홈스는 공포의 문화로 회사를 통치했다. 잡스는 직원들이 자긍심을 느끼게 했지만, 홈스는 그들이 고객에 대해 죄책감이 들게 만들었다. 애플의 제품은 토론과 협업의 산물이었지만, 테라노스는 보안을 이유로 부서 간에 높은 칸막이를 쌓았다. 이 책의 제목은 영어로 '불화, 증오, 미움'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며, 홈스가 구축한 기업 문화를 상징한다.
또한 애플의 이사회는 업계 최고 권위자들로 구성된 반면, 테라노스의 그것은 키신저나 제임스 매티스(현 미 국방장관) 같은 명망가 일색으로 구성돼 홈스의 일탈을 막지 못하고 방조했다. 스티브 잡스를 존경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은 파멸을 자초할 수 있다.
이지훈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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