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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민족운동가 이끌고 법률전문가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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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5] 제헌헌법을 제정하다

제헌헌법 초안 마련한 헌법기초위원과 전문위원들

제헌헌법 초안을 마련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제헌의원 30명으로 구성됐다. 헌법기초위원은 제헌국회의 3대 정파였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민당, 무소속이 대체로 균형을 이뤘다. 위원장은 한민당의 서상일, 부위원장은 독립촉성국민회 이윤영이 맡았다. 서상일은 1909년 안희제·김동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민족운동을 벌였고, 일제 치하에서는 '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활동한 국내파 독립운동가였다. 이윤영은 감리교 목사로 1945년 11월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당의 부당수였다. 그는 조만식이 소련군에 연금되자 월남해 서울에서 재건된 조선민주당을 이끌고 있었다.

조선일보

(위 왼쪽부터)서상일, 이윤영, (아래 왼쪽부터)유진오, 권승렬


헌법기초위원회를 도울 전문위원으로는 법률 전문가 10명이 선임됐다. 핵심 인물은 유진오 고려대 교수와 권승렬 미군정청 사법부 차장이었다. 유진오는 경성제대 1회 졸업생으로 경성제대와 보성전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당시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헌법 전문가였던 그는 1948년 5월 신익희의 주선으로 행정연구회와 공동으로 헌법안을 마련했다. 행정연구회는 임정 내무총장 출신인 신익희가 1945년 12월 환국 뒤 정부 수립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을 모아 만든 모임이다. 권승렬은 일제 치하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 미군정에서 사법 관련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김병로·이인 등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한 동료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으로 헌법안을 만들었다.

1948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들은 유진오·행정위원회 헌법안과 권승렬 헌법안의 통일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헌법기초위원회에 두 개를 모두 제출했다. 표결에 부친 결과 유진오·행정연구회 안이 13표, 권승렬 안이 11표를 얻어 전자가 기본안, 후자가 참고안이 됐다.

두 개의 헌법안은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유진오·행정연구회 헌법안은 '한국헌법'이란 이름이 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한국 인민(人民)은…"으로 시작되는 전문(前文)에 이어 제1조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한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發)한다"로 돼 있었다. 권승렬 헌법안은 이름과 전문은 없고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로 돼 있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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