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역행하는 미스코리아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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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비키니를 입은 채 걸어나와 자신들을 “예쁘게 봐달라”고 말한다. 한때 온가족이 둘러앉아 보던 미스코리아 대회. 지상파에서 보이지 않아 폐지된 줄 알지만, 여전히 해마다 열리고 있다. 원피스 수영복이 비키니 수영복으로 바뀐 게 변화라면 변화다. ’탈코르셋’, ‘미투 운동’ 바람이 불고 있는 시대의 흐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저의 장점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입니다. 저만의 건강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섹시함과 귀여움을 동시에 갖췄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비키니 차림에 힐을 신은 32명의 20대 초반 여성들이 한명씩 걸어나오며 자신을 소개했다. 화면 하단에는 후보들의 나이와 키, 몸무게가 공개됐다. 대부분 키는 170㎝이상, 몸무게는 50㎏대였다. ‘34-24-34’와 같은 신체 사이즈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비키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8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장면이다. 이날 대회는 문화방송(MBC) 계열 케이블방송인 엠비시에브리원과 엠비시뮤직, 네이버티브이의 스페셜채널 ‘브이라이브’에서 생중계됐다.
1957년 5월 첫 대회 열려
1970년대부터 지상파 중계
온가족 함께 보던 ‘인기프로’
90년대 폐지 여론 높아져
2002년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미투 바람에 미스아메리카도
올해부터 수영복 심사 폐지해
우리나라는 비키니 입고 행진
성 상품화·뷰티산업 광고 수단
“시대역행…이제는 폐지할 때”
바비인형처럼 생긴 후보들이 한 명 두 명 지나갈수록 나도 모르게 점점 그들의 몸매를 부위 별로 세세하게 평가하게 됐다. 170㎝가 넘는 후보들이 대부분이니 168㎝는 작은 키로 느껴졌다. 팔다리는 가늘어도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한 것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배에는 복근도 있어야 했다.
비키니 퍼레이드가 끝난 후에는 포토제닉상 등 특별상 시상식이 이어졌다. 후보들은 흰티와 스키니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후 후보들은 이브닝 드레스로 갈아 입고 무대를 다시 한바퀴씩 걸었다. 본선에 진출할 15명이 발표됐다. 본선에 진출한 최종 후보들의 ‘센스와 재치’를 보겠다며 돌발 질문이 주어졌다. “생방송 무대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고생한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면?” “현재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다면?” 등의 질문에 후보들은 “부모님과 찜닭을 먹고 싶다”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등의 답변을 내놨다. 엠씨를 맡은 방송인 박수홍과 가수 유라는 연신 “센스가 돋보였다”, “재치 있는 답변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미 4명, 선 2명, 진 1명 순서로 진·선·미를 발표했다. 대회를 주최하는 <한국일보>의 이준희 사장은 발표를 하며 “단순히 외모만 보는 것이 아니라 품성, 재능, 자질, 종합적인 미를 평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품성, 재능 등을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 평가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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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대회가 열린 직후부터 다음날까지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에는 ‘미스코리아’와 입상자들의 이름이 상위권에 계속 오르내렸다. 관련 기사 댓글과 각종 에스엔에스(SNS)에는 입상자들의 외모에 대한 ‘품평’이 쏟아졌다. 악플도 많았다.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긴 미인대회인 ‘미스아메리카’는 지난달 5일, 97년간 이어진 수영복 심사와 드레스 행진을 폐지하기로 했다. 여전히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이 같은 미스 아메리카의 변화에는 지난해부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 역시 미투운동과 과도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탈코르셋운동’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비키니 심사까지 하며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대회가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온가족 같이 보던 미스코리아 대회
우리나라에서 미스코리아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57년 5월의 일이다. ‘만 18세에서 28세 사이, 한국 여성으로 지·덕·체의 모든 면에 진선미를 겸비한 사람, 직업의 유무는 불문하나 흥행단체 또는 접객업소에 종사한 일이 없는 미혼여성’이 당시의 응모 자격이었다고 한다. 주최 쪽인 <한국일보>는 최근 미스코리아 소개 기사를 통해 “이 시기 미스코리아의 위상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 못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미스 유니버스대회 출전에 앞서 경무대(청와대)를 예방했고, 1960년대엔 대통령 내외가 미스코리아 대회 진·선·미를 공식 접견하기도 했다. 1972년 지상파 방송 중계가 시작되면서 파급력은 더욱 커졌고 국민들 사이에 인기도 계속 올라갔다. 198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3회 미스코리아대회 중계방송 시청률은 무려 54%에 달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미스코리아 대회를 함께 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미스코리아대회는 김성령, 오현경, 고현정 등 여성 연예인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미스코리아대회는 ‘여성 성상품화 논란’에 휩싸이며 폐지 요구에 부딪혔다. 1999년 ‘안티 미스코리아대회’(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해 노래·연기 등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고 관객들의 투표로 대회 주인공을 선정. 6회까지 개최)까지 열리는 등 비판이 거세지자, 2002년 지상파 방송은 미스코리아 대회 중계를 포기했다. 미스코리아 대회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계권이 케이블방송으로 넘어가면서 시청률과 영향력은 크게 떨어졌다. 2004년엔 수영복 심사도 폐지됐다. 그러나 2012년 수영복 심사는 슬그머니 부활했고, 2014년에는 수영복 형식이 파란색 원피스 수영복(위아래가 붙어있는 수영복)에서 비키니 수영복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미인대회는 우리보다 더 오래됐다. 미스아메리카 대회는 1921년부터 개최됐다. 수영복과 이브닝드레스 심사는 첫 대회 때부터 계속돼온 미인대회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도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브래지어 등 여성 억압을 상징하는 물건을 불태우며 미스아메리카 반대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꿋꿋이’ 버티던 미스아메리카대회는 결국 시대의 변화와 미투운동의 파도에 밀려 100년 가까이 된 수영복과 드레스 심사를 최근 페지한다고 발표했다.
칼슨 미스아메리카대회 조직위원장은 지난달 5일 미국 공중파 방송인 에이비시(ABC)의 아침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우리는 더 이상 겉모습으로 후보자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스 아메리카는 미녀 선발대회가 아니라 다양한 체형의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스아메리카 조직위원회 쪽은 “수영복 심사를 폐지하는 대신 참가자들은 삶의 목표와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되면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 심사위원들과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참가자들은 이브닝드레스 대신 자신의 개성과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입고 심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이런 변화는 오는 9월 열리는 올해 대회부터 적용된다.
미스아메리카대회, 수영복 심사 폐지
올해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김수민씨는 대회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스코리아는 여성성을 상품화하는 시스템이 아니다”며 “인터뷰, 심층 면접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하고, 지원자들의 생각과 소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스코리아는 예쁜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다. 사회 전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한 누리꾼은 “미스코리아가 예쁜 사람을 뽑는 대회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왜 키와 몸무게를 공개하고 수영복 심사를 하나. 사회 전반에 관심이 많은지를 수영복 입은 모습을 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성상품화가 아니라고 포장하는 것이 우습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 누리꾼 뿐 아니라 미스코리아 대회에 대해 시대에 역행하는 행태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이가현씨는 “아직도 미스코리아대회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말이 수영복이지 속옷과 다름없는 차림으로 여성들을 전시하고 외모 품평을 하는 대회가 버젓이 남아있다는 게 충격적이다. 여성인권을 위해 하루 빨리 대회가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국내에서도 올해 초부터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데 이어 최근에는 ‘탈코르셋운동’ 바람도 불고 있다. 코르셋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여성들이 상체가 날씬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입었던 보정 속옷이다. 코르셋 때문에 갈비뼈가 부러져 숨지는 여성이 있었을만큼 고통스러운 옷이다. 이 때문에 코르셋은 ‘강요된 아름다움’의 상징이 됐다. 탈코르셋 운동은 화장, 날씬한 몸매, 긴 머리 등 여성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을 ‘코르셋’으로 규정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 동참하는 여성들은 외모에 대한 품평을 거부하고 과도한 ‘꾸밈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탈코르셋운동은 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외모지상주의와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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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안티 미스코리아대회를 주최했던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기자였던 조박선영 <이프북스> 편집장은 “당시 안티 미스코리아의 1차 목표는 지상파 중계 폐지였다. 황금 시간대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볼 프로그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상파에서 중계를 하지 않게 되면서 미스코리아 대회는 하위 문화가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각종 미인대회는 더욱 늘어났고 여성에 대한 더욱 노골적인 성적 상품화, 대상화 현상이 심화했다”며 “결국 이런 대회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이를 활용하려는 광고주 등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개개인이 각종 미인대회에 대해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일보>는 대회 소개 기사에서 “미스코리아 대회는 ‘코리안 뷰티’를 규정하고, 뷰티 산업을 선도했다. 이들은 단연 최고의 광고 모델이었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협찬에 뛰어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선영 티브이평론가는 “예전보다 대중적인 영향력은 줄었지만 미스코리아 대회는 화장품, 패션 등 뷰티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광고주들을 위한 행사”라고 말했다. 그는 “미스코리아대회만큼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규격화하고, 여성을 바라보는 획일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없다.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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