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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노르웨이 화물선 탐파호는 인도네시아 부근 공해상에서 낚싯배에 위태롭게 타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난민 438명을 구조했다. 난민들의 행선지는 호주의 크리스마스섬. 난민 신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호주 정부는 국제법상 이들을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난민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몽골계 하자레인들은 아프간에서조차 인종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상시적인 폭력과 학살에 노출돼 있다. ‘핍박이나 전쟁, 폭력 탓에 본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는 유엔난민기구(UNHCR)의 정의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호주의 의료구호단체 ‘날아다니는 의사들(RFDS)’은 탐파호 선상에게 15명의 의식불명인 환자와 임신한 여성, 아픈 아이들이 있다면서 긴급 구조를 호소했다. 하지만 존 하워드 호주 정부는 “단 한 명의 난민도 상륙해선 안된다”면서 탐파호의 자국 영해 진입을 거부했다. 하워드 총리는 “불법이민자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숫자로 늘어나는 것에 선을 긋는 것이 국익”이라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워드 정부는 각국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8월29일 탐파호의 영해 진입을 일시 허용했다. 하지만 진입과 동시에 특수부대를 동원해 난민들이 호주땅을 밟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하워드가 고안해 내놓은 게 ‘태평양 해법’이었다. 태평양 도서국가들에 난민 수용에 필요한 돈을 지원해 호주 입국을 막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작금에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취한 조치와 비슷하다. 그 결과 주로 여성과 아이들 200여명은 뉴질랜드에, 200여명의 남자들은 호주로부터 1650만호주달러(약 130억원)를 받은 나우루에 수용됐다. 태평양 곳곳의 수용소에서는 2012년 이후 12명의 난민이 자살했다. 같은 해 10월 호주 인근 해역에선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불법이민자 아이들 강제 격리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두 달 뒤 대부분 이라크 난민인 250명을 태운 허술한 선박이 영해에 접근하자 이번엔 호주 해군이 동원됐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피해 나온 난민들은 별안간 눈앞에 등장한 군인들 탓에 극도의 불안감을 보였던 듯하다. 침몰 위기의 배가 견인되는 과정에 한 난민 남자가 여자아이를 들어 배 밖으로 내보였다. 접근하면, 또는 추방하면 떨어뜨리겠다는 위협이었다. 하워드 정부가 언론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한 탓에 정확한 경위에 대한 취재는 안돼 있다고 호주 언론인 아멜리아 리스터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전했다. 하지만 사진이 찍혔다. 배는 침몰했고, 난민들은 크리스마스섬에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태평양 해법’에 따라 마누스섬에 보내졌다. ‘아이들을 배 밖에 사건(children overboard affair)’으로 이름 붙여진 비극이었다.
호주 상원 특별조사위의 확인 결과 실제 바다에 던져진 아이들은 다행히 없었지만 난민 문제의 비극적인 상징이 됐다. 같은 달 역시 크리스마스섬을 향하던 난민선이 침몰해 350명의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 죽었다. 하워드 정부의 인정머리 없는 난민정책에 여론이 들끓었지만, 양심은 기표소 안에서 죽었다. 그해 가을 총선에서 하워드는 거뜬하게 재선돼 호주 역사상 두 번째로 긴 11년 동안 총리를 지냈다. 하워드는 유권자들의 불안을 정확하게 읽은 셈이다. 9·11테러 뒤 미국의 잇단 침공으로 빚어진 인도주의적 참사였다. 탐파호 선원들은 2002년 유엔난민기구로부터 ‘난센 난민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탐파호 사건 이후 반이민, 반난민 정책은 여야를 막론하고 호주 정치권이 공유하는 표준으로 굳어졌다.
대규모 난민 사태가 핵심 글로벌 이슈가 된 지 오래다.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은 미국이 제공했다. 월스트리트발 글로벌 금융위기→각국의 긴축정책→아랍의 봄→이슬람국가(IS)의 발흥 끝에 일어난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간 대리전 양상을 보이는 예멘 내전이 대표적이다. 난민과 이민은 포퓰리즘이 집단서식하는 숙주의 하나로 굳어졌다.
전쟁·박해 피해자들 비슷한 운명
히틀러 ‘유대인 박해 묵인’ 대가로
모든 유럽인이 고난의 역사 경험
유럽에 ‘반난민 바람’ 아이러니
트럼프는 중간선거에 이용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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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라졌던 ‘아이들을 배 밖에’ 논란이 재연된 것은 최근 ‘트럼프의 미국’에서다. 불법이민자 아이들을 부모와 강제 격리수용토록 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불을 질렀다. 트럼프가 누구인가. 바로 말 없는 다수의 속마음을 읽고 정치적으로 횡재한 포퓰리스트가 아닌가. 트럼프의 난민정책 역시 정치적 타산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2001년 호주 총선에서 그랬듯이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민 문제를 최고 이슈로 키웠다. 트럼프는 불법이민자 아동 격리수용 행정명령을 번복한 지난 20일 엉뚱하게 “인간적이고 합법적인 이민정책을 원한다면 민주당(의)원을 퇴직시키고 공화당원을 선출, 국경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주 덜루스의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미국·멕시코 국경에 건설하려던 불법이민 통제를 위한 장벽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의 낙선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장벽 건설은 민주당 및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80억~120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기왕에 이민 문제가 부각된 기회에 올라타 중간선거 압승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부모와 떨어져 철창에 갇힌 아이들의 모습이 미국 사회의 양심을 때렸다. 퀴니피액 대학·CNN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2 대 1 비율로 트럼프의 불법이민 어린이 격리 정책에 반대를 표한 배경이다. 하지만 호주의 경우에서처럼 일단 기표소 안으로 들어간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반난민, 반이민의 극우 바람이 거센 미국과 유럽은 우연히 기독교 국가이다. 해서 많은 포퓰리스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배척을 넘어 이슬람공포증(이슬람포비아)을 명분 아닌 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를 위해 있지도 않은 가짜뉴스를 유포하거나 불법이민자들의 위협을 확대 포장한다. 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우리는 프랑스인답게 살고 싶다”는 호소로 지난해 대선 1차 투표에서 21.4%의 표를 훔쳤다. 무슬림 이민자들 탓에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주장이었다. 제2종교가 이슬람인 나라, 해마다 라마단 바겐세일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이슬람포비아를 확산시킨 것이다.
독일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최근 트위터로 “수십만명의 이민자들 탓에 독일의 범죄발생률이 올라가고 있다”면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저항이 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독일의 범죄발생률은 26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호르스트 제호퍼 독일 내무장관이 지난해 범죄발생률이 전년보다 줄어든 9.6%였고, 특히 비독일인 범죄는 22.8%가 줄었다고 반박한 연유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젊은 독일 여성에 대한 이민자들의 강간, 살해 범죄 사례를 확대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여성이 관련된 살인사건은 2000년 30건에서 지난해 17건으로 줄었다. 물론 포퓰리스트들에게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별 필요가 없다. 일단 싹을 틔운 반이민 이슬람포비아는 인터넷 자동 댓글처럼 순식간에 복제, 확대된다. 지난해 독일 총선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돌풍을 일으킨 배경이다.
전체 예멘 난민의 0.4% 상륙 놓고
낯선 도전 앞에 선 한국 민주주의
일부 반난민 시위는 ‘역사 도착’
우리 안의 혐오 다른 표현일지도
증오의 싹 방관할 건가 묻는다
많은 한국인에게 강 건너 불이었던 반이민, 반이슬람 증오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 수백명을 추방해야 한다는 일부 일탈한 개신교도들의 시위와 청원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그나마 유럽은 이슬람권과의 지리적 근접성과 오랜 세월 동안 공동의 지정학적 공간에서 동거해온 영욕의 역사라도 있다. 유럽과 미국은 알카에다에서부터 IS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테러의 직접적인 피해국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분단국에서 느닷없이 유포되고 있는 이슬람포비아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희귀종’이다. 한국 사회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나, 무슬림 난민들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피해와 거리가 멀다. 선거를 앞둔 정치적 타산에 도움이 되는 단계도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지난 21일까지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예멘인은 전 세계 예멘 난민의 0.4%(1005명)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증오의 다른 표출이 아닌가 싶다.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고속성장한 한국 보수 개신교의 일부가 ‘빨갱이’ 대신 찾아낸, 새로운 증오와 배제의 주홍글씨로 읽힌다. 유대인은 예수를 박해했다는 빌미로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배제의 대상이었다. 제주의 반난민 시위에 유대인의 상징이기도 한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한 것은 종교적, 역사적 도착(倒錯)의 증좌다.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태극기 시위’와 사촌 간이기도 하다.
전쟁이나 박해를 피해 고국을 떠나 떠도는 난민들은 시대의 소산이다.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가장 취약한 주민들을 배제당하고 박해당하도록 허용한 나라의 주민들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하기 십상이다. 유럽 각국이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묵인한 결과 나라 간의 우의가 붕괴된 것은 물론, 모든 유럽인이 고난을 겪지 않았던가.
그 자신이 유대인 난민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난민들의 재앙은 일상과 자유, 행복추구권, 법 앞에서의 평등,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난민들이 박탈당한 기본권을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제도를 갖춰놓지 않은 채 추상적인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설파했다. 여전히 많은 경우 우물 안에 있는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낯선 도전이다.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본질이 달라진다. 난민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지, 위험인자로 바라보는 증오의 싹을 방관할 것인지, 양자 택일의 문제다. ‘세계의 고민’이 제주에 상륙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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