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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일)

[허연의 책과 지성] 아룬다티 로이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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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바다의 비밀을 간직한 채 도시로 나온 어부처럼."

"어떤 일은 받아야 할 벌과 같이 오는 법이다. 붙박이 옷장이 딸린 침실처럼."

1990년대 중반 영국의 독보적인 문학출판 에이전트인 데이비드 고드윈은 인도 남부 케랄라주에서 보내온 투고 원고의 몇 줄을 읽고는 곧바로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다. 원고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세상에 없던 은유들이 정교하게 짠 옷감을 연상시키듯 소설 속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투고자가 창조해낸 그만의 미학이었다. 인도로 날아간 고드윈은 아룬다티 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30대 초반의 투고자를 만나 당시로는 거액인 16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선인세를 지불하고 책을 계약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책이 '작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s)'이다. 고드윈의 예측대로 책은 나오자마자 부커상을 받았고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되어 600만부가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아룬다티 로이는 1961년 인도 남부에서 힌두교도인 아버지와 시리아 정교를 믿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케랄라주 아예메넴에서 성장한 그는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작은 것들의 신'은 그의 반(半)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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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카스트제도, 남존여비, 가부장, 종교차별 등 부당한 전통에 의해 파괴된 가족사를 다룬다. 거대한 관습의 폭력에 힘없이 무너져내린 작고 아름다운 것들의 슬픈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 제목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소설의 중심 이야기 구조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인 에스타와 라헬이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은 어머니 암무의 죽음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암무는 알코올중독인 차농장 지배인과 결혼했다가 이혼한다. 쌍둥이를 데리고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그를 부모들은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마을에는 불가촉천민인 벨루타가 산다. 손재주가 좋은 목수인 그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기독교로 개종까지 했지만 그 사회에서도 신분차별은 그대로였다.

그러던 중 이혼녀 암무와 불가촉천민 벨루타 사이에서 사랑이 싹튼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끝이 보이는 환희에 깊숙히 빠져 들었다.

"생명이 그 춤을 안무했다. 두려움이 박자를 맞추었다. 전율 하나하나에 대해 그와 동일한 고통을 치르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얼마나 멀리 갔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기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무서운 규칙을 어긴 것이다. 사랑의 방식마저 규정해 놓은 관습을 어긴 벌로 그들은 죽음에 내몰린다. 위기에 처한 벨루타는 지역 공산당까지 찾아가 호소하지만 그들도 관습의 편이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벨루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의 구타에 의해 숨지고, 마을을 떠난 암무도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이 소설 한 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룬다티 로이는 사회운동가로 변신한다. 현재도 환경 인권 반핵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로이는 이 소설 한 편 이외엔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로이만이 쓸 수 있는 은유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말이다.

"암무는 키스의 투명함에 놀랐다. 유리처럼 맑은 키스였다. 열정이나 욕망에 흐려지지 않는, 돌려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키스였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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