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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한 끗 차이가 만드는 아이러니… 37년차 소설가의 사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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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짧은 소설집 '만든 눈물 참은 눈물'을 낸 이승우 작가는 "책을 읽은 누군가 수수께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짧은 질문이나 희미한 대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냈으면 좋겠다고 감히 바란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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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헤어지자고 한다. 알고 보니 바람둥이였다. ①그는 연애하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②헤어지면서 우리가 사랑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 어느 쪽이 더 쓰라릴까. 이승우(58) 작가에 따르면, ②다. 질척거릴 도의적 권리마저 부정하는 잔인한 말이므로. 헤어진 애인을 두고 “지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워지고 싶다”고 처연하게 소망하는 심리는 뭘까. 기억될 자격조차 상실한 가여운 피해자가 되려는 거다. 산뜻하게 새 사랑을 시작하려면 죄책감을 탈탈 털어버려야 하므로.

이 작가가 짧은 소설집 ‘만든 눈물 참은 눈물’(마음산책)에 풀어 쓴 이론이다. 이순을 앞둔 소설가의 사랑론이 이토록 현대적이라니. 책에는 200자 원고지 10~30장 분량의, 그야말로 짧은 소설 27편이 실렸다. 몇 편은 에세이로 불러도 될 것 같다. 짧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사는 것과 쓰는 것을 예리하게 통찰한 글이라서, ‘휙휙’보단 ‘느릿느릿’ 읽기에 알맞다. 37년째 소설을 쓰는 ‘이승우’라는 이름이 보증하는 문장들은 한 번,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표제작은 TV에 나와 뭔가를 사과하는 영화배우의 이야기다. 현실 속 죄 지은 유명인들처럼 그도 억지로 눈물을 만든다. 그냥 눈물로는 부족하다. 애써 눈물을 참는 제스처로 호소력을 더해 줘야 한다.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게 목적인지, 참는 게 목적인지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가식이 가식을 쓰고 차라리 진실이 되는 순간을 알아 보는 건, 애인을 떼놓느라 ‘만든 눈물과 참은 눈물’을 흘린지 얼마 안 된 누군가다.
한국일보

만든 눈물 참은 눈물

이승우 지음

마음산책 발행∙200쪽∙1만3,500원

이 작가는 ‘한 끗 차이가 만드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요리조리 고민한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하는 것’ 중에 뭐가 더 힘들까. 그걸 알아내려고 ‘먹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과 ‘굶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의 고통을 비교하는 실험을 한다. 소설에선 후자의 피험자 집단이 더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출근해야 하는 것이 끔찍할 때마다 결근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으면 위로가 될까.

인생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소설엔 지질한 인물들이 줄줄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 작가는 그런 클리셰를 거부한다. 사치를 하다 하다 ‘실크 몸빼’까지 만들어 입은 중년 여성은 당당하다. “그럼 벗고 다녀요?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요? 사냥이 있는 거지요!” 근로자의 날을 챙겨 쉬는 의식 있는 걸인은 선글라스, 의족 대신 개를 빌려 ‘구걸 소품’으로 쓴다. “사람들은 개의 아픔을 더 아파하고 개의 슬픔을 더 슬퍼하는” 세상이니까. 프랑스가 사랑하는 작가의 프랑스식 블랙 유머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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