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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양해원의 말글 탐험] [68] 약팀이 이기면 반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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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양해원 글지기 대표


한밤중 광화문 대로 거니는 맛이 그렇게 오질 수 없었다. 이탈리아 이겼겠다, 차도 안 다니겠다…. 붉은 물결에 온 나라가 출렁거린 한일 월드컵. 이제 그런 바람 사뭇 잦아들었건만, 마냥 심드렁할 수 없는 나날이다.

'스웨덴과의 1차전을 응원하러 나온 시민들은 각종 도구를 동원해 목청껏 응원전을 벌였지만….'축구가 워낙 전쟁 같아서 그럴까. 언론 매체마다 응원에 '전(戰)'을 붙이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가. 서로 다른 팀 받드는 사람들이 한곳에서 응원으로 맞붙은 게 아니어서 들어맞지 않는다. 그냥 '응원을 벌였지만' 하거나 '응원했지만' 하면 그만이다.

입에 워낙 익은 탓인지 이 '전'은 엉뚱한 자리에도 붙는다. '방탄소년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메리칸뮤직어워즈 축하 공연 무대로 미국 데뷔전을 치렀다.' 어디서 처음 하는 공연이 누구와 싸우는 일은 아니잖은가. '축하 공연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고 쓰면 될 텐데.

그나저나 한창 가슴앓이할 신태용 감독, 러시아로 떠나기 전 한 말이 있다. "통쾌한 반란을 한번 일으키고 돌아와 국민과 축구 팬들한테 사랑받도록…." 마음인즉슨 모를 바 아닌데, '반란(叛亂/反亂)'이 뭔가. 지배층을 거역해 난리를 일으킴을 말한다. 거스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 깔려 있어 거슬리지 않는가. 서열 57위 한국은 15위(멕시코)나 1위(독일) 딴지 걸지 말지어다? 축구에 그런 게 어디 있나. 2002년 한국은 그럼 '대역죄(大逆罪)'라도 지었다는 말인가. 수많은 언론 매체가 '반란'을 외치는데, 과연 알맞은 비유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아쉽다. 차라리 '거사(擧事)'라 하면 어떨까.

'오늘 밤, 한 사내는 운다.' 16년 전 호나우두와 베컴의 브라질-잉글랜드 8강전 예고 기사 제목이다. 조선일보를 장식한 이 촌철살인(寸鐵殺人)처럼 우리 선수들의 숨 막히는 경기를 봤으면 좋겠다. 한 번쯤 이기면 더없이 좋겠다. 질깃질깃한 미련(未練), 축구가 뭔지….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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