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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흰 살 생선처럼 담백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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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심포니 지휘자 개피건, 24일 예술의전당서 '맛있는' 공연

"흐르는 물에 배추를 씻어 널따란 통에 담으세요. 소금과 설탕을 슬슬 뿌려 조물 조물 마사지해주고요. 한 줄기 죽 찢어 맛을 보아도 달콤새콤할 거예요. 중요한 건 가만히 놔두고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 그래야 양념이 배춧속까지 스며듭니다."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건 뜻밖에도 '김치 담그는 방법'.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튕기며 '챱~' 입맛까지 다신다. 미국·유럽·아시아의 클래식 시장에서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는 지휘자 제임스 개피건(Gaffigan·39)이다.

조선일보

21일 서울에 도착한 제임스 개피건은“글을 모르는 어린아이일수록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 클래식도 그렇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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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지휘와 뜨거운 열정'(뉴욕타임스)으로 현재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개피건이 루체른 심포니와 함께 21일 서울에 왔다. 2004년 게오르그 숄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11년 루체른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경쾌한 해석으로 200년 넘은 악단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심포니는 세계 최고 음악 축제 중 하나인 루체른 페스티벌을 책임지는 명문 악단. 개피건은 "끼니마다 최선을 다해 음식을 먹듯 음악을 지휘한다"며 "감성에 치우쳐 질척대지 않고, 디테일을 후루룩 삼켜버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고전과 낭만을 아우르는 이번 프로그램 역시 근사한 만찬에 빗대 설명했다.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은 한 잔의 샴페인. 그보다 철학적인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흰 살 생선처럼 담백할 거예요. 메인은 브람스 교향곡 1번. 맛 좋고 몸에도 좋은 최상급 쇠고기로 바비큐를 만들어 강렬한 레드와인을 곁들일 거예요."

아버지는 기저귀와 물티슈 등을 만드는 프록터앤드갬블(P&G)의 영업직 사원이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학교의 이름 없는 사무직. 가난했지만 집에 있던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놀이동산 삼아 개피건은 건반을 신나게 찧고 눌렀다.

줄리아드음악원 예비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그는 "악보를 읽지 못했다"며 웃었다. "그게 저의 상상력을 살찌웠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음악은 귀로 듣는 것. 지시어로 가득한 악보는 잠시 밀쳐두고 듣기부터 하세요. 듣고, 따라 하고, 충분히 느낀 다음 악보를 봐도 늦지 않아요. 살면서 겪는 일 중에 설명서부터 나눠주고 '5분 뒤 이런 일이 발생할 거야' 알려주는 경우가 있던가요?"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음악을 들었다. 종종 학교 수업을 제쳤지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도서관. 덕분에 퍼즐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퍼즐을 앞장서서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개피건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8만 관중이 운집한 '파크 콘서트'를 이끌었다. 100명의 오케스트라, 수천 명의 관객,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 휩싸여 매번 빛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콘서트홀을 떠나는 순간 지휘자를 감싸는 건 고립이다. "환호와 고독 사이에서 시소를 잘 타는 게 중요해요.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증명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늘 곁에 둬야 하죠."

루체른 심포니=24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99-5743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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