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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friday] 나를 닮았나? 마음은 안 그런데 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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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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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더 이상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는 때가 오지요. 나는 그저 볕을 막아주는 차양이거나, 발밑의 카펫 혹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수납해주는 창고가 되어주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것이 인생 2막의 지혜이겠지요.

홍여사 드림

오랜만에 중학생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주차장에 내려가 아들과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10분이 다 돼도 내려오지를 않는 겁니다. 전화를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새 둘이 한판 붙은 모양입니다. 한참 사춘기 터널을 통과 중인 아들과 갱년기 초입의 아내. 둘 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걸핏하면 이렇게 큰 소리가 납니다. 영화는 물 건너간 셈. 도로 올라가 자초지종을 들었죠.

아내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지난번 영화 볼 때 아들이 안경을 안 가져간 기억이 나서, 한마디 했답니다. 안경 꼭 챙겨라! 그러자 아들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알았다고 좀. 그만해." 아무리 바빠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겠죠.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 "아우~, 또 시작이야!"

들어보니 이번만큼은 아들이 잘못했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안경에 관한 한,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작년에 아들이 처음 안경을 쓰게 되었을 때 아내가 정말 안타까워했었거든요. 아빠 닮아 눈은 좋은가보다 했는데, 역시 자기를 닮았나보다고. '안경이 얼마나 귀찮은 건데…' 하며 아들에게 미안해하던 아내의 눈물이 기억났습니다. 그런 엄마 마음도 모르고 건방지게 대든 아들놈. 저는 아들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일단 흥분한 두 사람을 떼어놓고, 알아듣게 얘기를 해보려고요.

놀이터 의자에 앉아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아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죠. 엄마는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왜 순순히 듣지 못하느냐고요. 그러자 아들이 변성기 특유의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꾸하네요. "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더군요.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 한마디 말이 제 귀가 아닌 가슴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아, 저 말이 듣는 부모 귀에는 이렇게 매몰차게 들리는구나.

며칠 전의 일입니다. 어머니가 저희 집에 오셔서 하룻밤 묵고 가셨죠. 생전 아들 집에서 안 주무시는 양반인데, 그날은 저녁때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져서, 며느리의 만류에 못 이긴 척 주저앉으셨던 겁니다. 그래도 이튿날 아침 잡숫자마자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서시더군요. 마침 제가 휴무라,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같은 말을 열 번도 더하시는 겁니다. 휴일인데 밀린 잠을 자야지, 뭣하러 기름 쓰고 왔다 갔다 낭비하니? 어딜 가나 늙은이가 골치다. 노는 날 너희끼리 일찌감치 어디 놀러나 가라. 괜히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도 어머니는 마음을 놓지 못하셨습니다. 듣다 보니 짜증이 나더군요. 엄마는 왜 이렇게 자식 눈치를 보지? 아들 며느리 말을 못 믿고, 자꾸만 당신을 불쌍한 노인네로 만드는 것 같아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네요. "아,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좀!"

그날 어머니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괘씸하다는 투의 한숨조차 없으신 게 더 불편했습니다. 룸미러로 엿보니, 어머니가 소리 없이 눈물을 찍어내고 계시더군요. 그러고 한마디 하시는 말씀.

"늙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자꾸 서러워. 며느리 앞에서 아들한테 면박을 당하니 더 민망하고."

그 말씀 들으니 죄송했고,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은 또 바로 안 나가죠. 엄마는 그러니까 좀 당당하라고. 뭔 죄지었어요? 그리고 자식들이 다 알아서 하는데 무슨 잔걱정이 그렇게 많아. 내가 할 만하니까 하지. 응?

그렇게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았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제가 잔뜩 부어서, 어머니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드린 뒤 쌩 돌아서 와 버렸습니다. 그러고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옆에 앉은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제가 물었습니다.

"야 인마. 넌 역시 나를 닮았나 보다. 마음은 안 그런데 입이 문제야. 그치?"

아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저를 보더군요.

"너 지금 엄마한테 좀 미안하지? 솔직히 말해."

"…."

"엄마가 하는 말은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듣기엔 쓸데없는 잔소리라도 그 순간엔 '알겠어요'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이야. 이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외워. 머리 나쁘면 무조건 외워야 해."

"외는 건 더 못해요."

"잊으면 나한테 또 끌려나와서 혼나. 그리고 기억해 내. 수백 번 그러다 보면 나중엔 다 이해하게 돼. 알겠어?"

아들은 피식 웃더군요. 한번 웃으면 진 거고, 그걸로 끝인 줄을 아는 모양입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네요. 저도 일어섰습니다. 나란히 서니 키가 내 눈썹까지 와 있는 아들. 나도 제2의 사춘기를 맞아 이 녀석처럼 폭풍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연로해 심약해진 어머니에, 갱년기를 맞는 까칠한 아내, 그리고 덩치 큰 사춘기 아들까지 담아내려면, 이 정도 그릇 사이즈로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아들과 저는 어깨를 걸고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현관 앞에서 다시 분위기를 바꾼 뒤 집으로 들어갔죠. 씩씩거리며 들어간 저는 엄마한테 당장 잘못했다고 빌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들도 눈치를 채고 고개를 푹 꺾더군요. 그쯤에서 저는 빠져주었죠. 안방에 들어와 다리를 뻗고 기다립니다. 이제 곧 아내가 간식 먹으러들 나오라고 외칠 테죠. 아무리 감추려 해도 벌써 노글노글 화가 풀린 게 다 드러나는 얼굴로 말입니다.

그전에 저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나 한 통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긴말 필요 없고, 엄마 뭐 하셔, 한마디면 노글노글 풀어지기 시작할 걸 아니까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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