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점심은?] [Cover story] 삼시 두끼가 일상화… 쫓기듯 생존식사 하던 직장인들 점심에 변화 바람
/일러스트=김의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 서울 종로의 한 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장은선(34·가명)씨는 점심때 은행 근처에 포진한 맛집에 가 느긋하게 식사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다. 이 지점으로 발령난 지 1년이 지났지만 맛집 투어는 언감생심. 점심은 도시락을 주문해 지점 안 직원 탈의실 자투리 공간에서 해결한다.
식사, 정리, 양치질하고 오후 고객을 맞기까지 주어지는 점심 시간은 40분 정도. '고객 만족도 조사 기간'엔 점심 시간에도 돌아가면서 창구를 지켜야 하니 40분도 쪼개야 한다. "점심때 짬 내 은행 업무를 보러 오는 직장인 고객이 많다 보니 바깥에 나가 식사를 하기는커녕 도시락도 여유롭게 먹기 어려워요. 창구에 대기하는 고객이 많은 날엔 20분 만에 식사를 '폭풍 흡입'해야 한답니다."
#2. 서울 삼성동 소재 중견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 최민규(45)씨의 점심 단골 식당은 회사 인근 이름 없는 작은 식당. "먹을 만하다고 소문난 회사 주변 인기 식당은 점심 시간 20~30분 전에 가서 이름을 올려야 밥 먹을 수 있어요. 정오에 맞춰 느긋하게 갔다간 20~30분 줄 서기 십상이죠. 그만큼 식사 시간이 줄어드니 미식의 즐거움은 포기하더라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애용해요."
정오가 되면 도심의 거대한 빌딩은 샐러리맨들을 토해낸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처럼 식당 앞엔 생존 식사를 위한 행렬이 이어진다. 기업의 사내 식당은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줄이 길게 늘어선다. 직장인들이 주유소에서 주유하듯 식사 후 커피 한 잔 사 들고 회사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30분 이내인 사람도 있다. friday가 지난 12일 SM C&C의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를 통해 전국 성인 남녀 48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점심 시간이 '30분 미만'이라고 답한 사람이 34.4%였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5~8일 실시한 직장인 대상 점심 관련 설문은 현대 직장인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9월 실시한 설문과 비교·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은 평균 1시간 미만, 점심 인기 메뉴는 백반과 찌개류, 점심 한 끼 가격(도시락 포함)은 평균 623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오가는 이동 시간, 주문·대기·조리 시간 등을 감안하면 식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20분 안팎인 셈이다. 점심 식사가 전투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선 직장인들 사이에서 '알 데스코(al desko)'란 단어가 다시 유행이다. '알 데스코'란 2014년 옥스퍼드에 등재된 말로 본래 '책상에서'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사무실 책상에서 급히 먹는 점심'을 의미하는 말로 종종 쓰인다.
아침·점심·저녁 삼시 세끼 챙겨 먹기도 버거운 바쁜 현대인들에겐 점심과 저녁, 삼시 두끼가 일상이 되고 있다. 아침밥이 사라지는 시대, 하루의 중심이 된 점심 풍경을 들여다봤다.
최욱 건축사무소 ‘원오원아키텍스’ 2층에 있는 주방 ‘또’에서 최욱(앞줄 왼쪽에서 둘째) 소장과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주 4일 이곳에선 한식 전문 셰프가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과 소박한 제철 반찬이 식탁에 오른다. 직원들은 이렇게 챙겨 먹은 ‘밥심’으로 남은 반나절 뒷심을 발휘한다. (사진 오른쪽)‘원오원아키텍스’ 주방 ‘또’에선 점심시간 차가운 식판 대신 자체 제작한 그릇을 사용한다. 직원들은 대접받는 기분으로 식사한다./이광재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시 세끼 챙겨 먹기 어려운 사람들
아침과 저녁 사이, ‘마음의 점을 찍는다’는 뜻의 ‘점심(點心)’은 영양 공급뿐 아니라 하루의 중심에서 활력소가 되는 끼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색한 게 현실이다. friday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 49.8%가 ‘끼니를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대충 먹는다’라고 답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장영미(44·가명)씨의 점심 식사 시간은 30분. 병원 내 구내식당이 있지만 중환자실 한쪽 ‘라운지’라 부르는 공간에서 환자들 식사 시간에 맞춰 배식받아 식사한다. 얼마 전부터는 배식 시간에 맞춰 식사하기도 쉽지 않아 간단히 도시락을 싸 와 동료와 ‘틈새 식사’를 한다.
“점심 시간 1시간이 주어지는 외래 간호사와 달리 3교대 ‘데이 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4시 퇴근 시간을 맞추다 보면 아침은 포기하고 점심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어요.” 워킹맘인 장씨는 “데이 근무 날엔 온종일 굶으니 퇴근 후 사실상 저녁을 첫 끼로 먹는 날이 많다”며 “성장기인 초등학생 두 아이도 덩달아 아침을 거르고, 학교 급식과 저녁 두끼만 먹는 날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의 대형 외국어학원 상담 직원인 허소영(28·가명)씨는 혼자 점심을 먹는 ‘혼점’족이다. 성인 10명 중 1명이 혼자 점심을 먹는 세상이라지만 허씨의 경우는 자발적 혼점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마치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 먹듯 책상에 앉아 점심을 해결하는 날도 있다. 허씨는 “점심 시간인 정오 직전 상담 전화를 받으면 점심을 놓치는 일이 허다하다”며 “부랴부랴 달려가 허겁지겁 점심을 먹느니 ‘알 데스코’를 택했다”고 했다.
아침을 못 먹는 대신 점심을 아침처럼 든든하고 알뜰하게 먹는 사람들도 있다. 직장인 김신영(36)씨는 아침을 거르는 대신 오전에 짬을 내 회사 근처 단골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 ‘아점’을 먹는다. 다섯 살 된 아들을 챙기느라 바쁜 아내에게 아침 식사 차리는 것에 대한 부담을 주느니 회사 근처 식당을 택했다. “메뉴를 미리 주문하고 가면 식사 시간을 줄일 수 있어요. 점심을 좀 일찍 먹으면 저녁도 일찍 먹게 돼 저녁 시간이 한결 여유로워졌어요.”
(사진 왼쪽)점심의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현실은 편의점에서 ‘혼점’하기 일쑤. 아침을 거른 후라면 자극적이지 않은 메뉴를 선택해야 한다. (사진 오른쪽)서울 중구 SK 남산빌딩 1층에서 매달 첫째 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여는 버스킹 공연. 인근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조선일보DB· 한국버스킹협동조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 끼 먹는다면 ‘점심’ 선택
아침·점심·저녁 삼시 세끼 중 한 끼만 챙겨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64.4%가 ‘점심’이라고 답했다. 이유는 40.6%가 ‘일과 중 활력소가 돼서’, 19.2%가 ‘아침을 챙겨 먹기 쉽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식사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이들에겐 점심이 큰 의미가 없겠지만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직장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며 화젯거리다. 맛집 방영 메뉴가 다음 날 직장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는 건 흔한 현상이다.
웹디자이너 서현주(39)씨는 “일만 하다 동료와 마주하고 말랑말랑한 얘기도 나누며 점심을 먹고 나면 하루의 일과가 반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은 이른 아침 출근하고 반나절을 보내는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선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바캉스를 앞두고 ‘다이어트 등으로 저녁을 가볍게 먹기 위해서’(17.9%)나 ‘아침·저녁에 비해 메뉴 선택이 자유로워서’(15.7%)라고 답한 이들도 있었다. 건강을 위해 아침을 꼭 챙겨 먹자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 줄어들었다. 현실적으로 아침을 챙겨 먹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루 중 비중 있게 챙겨 먹는 끼니는 ‘저녁’과 ‘점심’이 각각 44.4%, 44%로 비슷하게 나왔다. ‘아침’이라고 답한 사람은 11.6%에 불과했다.
삼시 두끼 ‘허기진 일상’, 달라지는 점심
아침 못 먹는 ‘삼시 두끼 사회’, 직장 점심 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의도 현대카드 사옥 본사 3관,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등을 설계한 건축가 최욱 소장의 건축사무소 ‘원오원아키텍스’는 1년 반 전 서울 대신동에 있는 5층짜리 사무실 2층에 직원용 식당이자 주방을 만들었다. ‘또’라고 이름 붙은 이 공간에 직원 40여 명이 주 4일 오전 11시 30분이면 내려와 이른 점심을 먹는다.
2.5m 커다란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거나 라운지와 세미나실이 보이는 바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급 레스토랑의 풍경. 차가운 식판에 배식받는 게 아니라 자체 제작한 하얀색 도기에 음식을 담아낸다.
최 소장은 “직원이 대개 20~30대인데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거나 외식하는 비율이 높더라”면서 “하루 한 끼는 제대로 먹어야 체력이 뒷받침될 것 같단 생각에 주방을 만들어 점심을 함께 먹고 있다”고 했다. 제공되는 점심은 유명 한식당 ‘지화자’에서 15년간 부수석 셰프로 지낸 전문 셰프가 직접 조리한다. 도정기까지 있다. 바로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다.
“제대로 된 그릇에, 정성 담은 음식을 먹으면 자기 몸을 챙기는 습관이 생깁니다. 생활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그릇된 식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건축가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한 직원은 “자극적이지 않은 건강식을 먹으니 오후 일과도 속 편히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점심 식사 시간은 정오가 되면 끝난다. 직원들은 커피를 내려 마시고 1시간 동안 자유 시간을 보낸다.
1993년부터 일찍이 유연 근무제를 시행해온 유한킴벌리의 점심 문화도 삼시 두끼 시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직원들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1시간의 점심 시간을 정해 조정해 쓸 수 있다. 배철용 홍보부장은 “식당에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이른 점심을 먹고 짬을 내 요가수련실에서 요가를 하거나 자기 계발하는 직원도 있다”고 했다.
달라지는 점심 문화에 음식점은 점심 시간을 늘리는 추세다. 기존 점심 장사 시간대는 빨라야 오전 11시 30분, 늦어도 오후 2시 30분이면 끝나는 분위기였다. 요즘엔 오전 11시에 ‘아점’, 오후 4시에도 ‘늦점(늦은 점심)’할 수 있는 곳도 많아졌다. 이른 점심을 즐기는 브런치족에 이어 늦은 점심을 즐기는 ‘딘치(저녁을 뜻하는 ‘dinner’와 점심을 뜻하는 ‘lunch’를 합친 말. 늦은 점심이란 의미)’란 말도 등장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중심된 점심, 영양 더욱 꼼꼼하게 챙겨야
한국 직장인 평균 1시간의 점심 시간은 해외에 비하면 여유로운 편이다. 그럼에도 점심 시간이 전쟁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 점심 문화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최 소장은 “우리네 점심 문화는 농경시대에 농촌에서 함께 둘러앉아 새참 먹던 풍경과 비슷하다”며 “직장 문화는 도시화됐지만 점심 문화는 공동체 전통처럼 내려와 그대로다”고 했다.
한국식생활문화학회장 김혜영(55) 용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아침과 저녁에 비해 직장인들의 점심은 ‘사회적 관계를 위한 식사’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즐길 수 없어 더욱 빠듯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연희동 요리교실’인 ‘구르메 레브쿠헨’ 대표인 일본인 나카가와 히데코(51)씨는 “한국 직장인의 점심 시간은 일본보다 여유 있는 편”이라며 점심에 걸리는 시간 문제보다 ‘자극적인 메뉴 선택’을 우려했다. “아침을 거르고 출근한다면 점심은 분명 속에 덜 부담되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직장인 점심 부동의 인기 메뉴들은 백반과 찌개류다.
김혜영 교수는 “아침 식사는 건강을 위해 꼭 챙겨 먹어야 하지만 바쁜 일상에 어쩔 수 없이 거르고 두끼만 먹어야 한다면 점심을 앞당겨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골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17~20시간 만에 먹는 첫 끼를 잘못 먹으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삼시 두끼 허기진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가 온종일 판매하는 런치 특선 메뉴(맥올데이 세트)의 슬로건이 마음을 흔든다. ‘때는 놓쳐도 끼니는 놓치지 말자’.
[박근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