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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밀려드는 난민 서로 떠넘기는 EU 국가들 ‘걸어잠그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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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난민 거부는 비난하면서도 자국 수용은 꺼려

국제적십자·적신월사연맹 “유럽 가치에 대한 명백한 배반”

연정 위기 처한 독일 메르켈 총리, 이웃국가에 ‘SOS’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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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이 유럽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문명·문화적 가치란 것들이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인도주의와 연대를 통해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다면 유럽의 가치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다.”

이탈리아의 난민구조선 입항 거부를 두고 국제 적십자·적신월사연맹(IFRC)이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탈리아가 거부한 난민구조선 아쿠아리우스가 스페인 발렌시아 항구에 도착한 17일(현지시간), 엘하지 아 시 IFRC 사무총장은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탈리아 정부는 10일 프랑스 비정부기구(NGO) ‘SOS 지중해’가 리비아 해역에서 구조한 이민자 629명의 입항을 거부했다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탈리아 정부의 조치를 두고 “냉소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동안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유럽연합(EU) 리더십이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일부 국가에 과도한 짐을 떠넘기면서 그동안 눌러왔던 이탈리아의 불만이 아쿠아리우스호 사건을 통해 표출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럽국들 간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난민 문제 해결의 난맥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 더블린조약이라는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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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는 지난 5년간 70만명 넘는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민이 처음 발을 내디딘 국가에 우선적으로 난민 수용 의무가 있다는 더블린조약 때문이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EU는 난민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회원국의 인구규모, 경제력, 이전 난민신청 수용 등을 고려해 분담수용하기로 했지만 적극적으로 짐을 떠맡는 나라는 없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 리비아의 정정불안으로 이민자 행렬에 몸살을 앓았다.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 테러를 피해 중동 지역에서도 많은 난민이 건너오면서 부담은 가중됐다. 여기에 2%가 안되는 경제성장률, 50%에 육박하는 남부 지역의 높은 실업률로 국민들의 불만까지 더해졌다. 이탈리아에 극우·포퓰리즘 정부가 들어서고 EU와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스는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본격적인 난민위기에 직면했다. 그리스도 경제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자로 이전부터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갔다. 정부가 각종 복지제도를 축소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그리스인들 입장에서도 난민은 버겁다.

스페인·몰타 등 남유럽 국가들도 그리스·이탈리아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쿠아리우스 입항을 거부한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스페인의 이민자 629명 입항 허용에 고맙다면서도 “6만6629명을 더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국은 줄곧 난민 수용에 인색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대선 때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난민 포용적 리더십을 칭찬해놓고 집권한 뒤에는 난민신청 접수 기간 및 난민지위 거부 이후 이의제기 신청 기간을 단축하는 등 반이민 정책 일변도다. 최근에는 파리에서 가장 큰 이민자 임시 거주촌을 철거하기도 했다.

■ 난민, 받아도 문제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망명자·전쟁난민 등 전통적 의미의 난민보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들어온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들 경제적 이민자에게 더 적대적이다. 지난해부터 EU 회원국들이 해양경비를 강화하면서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유입 이민자들 대부분은 나이지리아, 기니, 세네갈 등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아프리카 국가 출신이었다.

각국 정부는 경제적 이민자와 난민들을 가려 받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난민지위 부여 권한을 대폭 늘리면서 행정절차가 복잡해지고 처리 시간도 길어졌기 때문이다. 2013년 개정된 더블린조약에 따르면 회원국들은 난민신청을 한 사람들의 개별 인터뷰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이송결정에 대해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요청 시 무료 법률지원도 의무화했다.

각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난민신청자들이 항소 기간 동안 그 나라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도록 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취업 및 각종 복지 혜택의 제한을 받는 난민신청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우려한다. 실제로 최근 독일에서는 난민지위가 거부된 이라크 출신 이민자가 항소절차 기간 중 14살 독일 소녀를 살해한 사건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의 반이민 정서가 극에 달했다.

행정당국이 밀려드는 난민신청자들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들의 입국으로 유럽 각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독일 브레멘 이민국의 한 관리는 뇌물을 받고 난민지위를 부여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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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걸어잠그고 보자

이런 상황에서 EU 회원국들은 일단 걸어잠그고 보자는 식이다.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는 아예 EU 블록 안에 이민자들이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EU 회원국들이 해양경비를 강화하는 데 합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인권탄압 비판을 받았던 호주의 역외난민수용 시설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아쿠아리우스 사건으로 으르렁댔던 마크롱 대통령과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15일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만나 EU 차원에서 난민과 불법이민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콘테 총리는 유럽으로 넘어오려는 난민들의 입국심사를 난민들의 출신국 현지에서 해야 한다며 EU가 나서서 이 문제를 논의하라고 촉구했다.

■ 다급해진 메르켈, 이웃국가에 ‘SOS’

독일에선 메르켈 총리의 ‘무터’(어머니) 리더십마저 흔들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지난 주말 독일 남부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그리스·이탈리아·불가리아 등 남유럽국 정부에 다른 EU 회원국들을 거쳐 이들 나라에 입국하려는 난민들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지를 물어봤다고 이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연정 파트너인 기독사회연합(CSU)이 반난민 정책을 고수하면서 연정이 깨질 위기에 처하자 취한 조치로 풀이된다.

CSU는 다른 EU 회원국에서 난민지위를 신청한 사람들의 입국을 막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관대한 난민정책 때문에 전통적 지지기반인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다.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오는 10월 주의회 선거에서 CSU가 과반을 점하고 있는 바이에른 주의회 상당수 의석을 가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EU는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 약화로 난민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 우려한다. 한 EU 집행부 고위 관료는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독일 내부 정치라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문제”라며 안타까워했다. 메르켈 총리는 CSU에 다른 이웃국가들과 협의할 수 있도록 2주만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CSU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메르켈 총리는 먼저 28일 EU 정상회의에서 CSU 안을 논의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독일과 국경을 접한 국가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돼 해법을 도출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FT는 CSU 안을 관철할 경우 오스트리아 남부·이탈리아 북부 국경의 브레너 고개를 포함해 국가별 난민 유입 루트가 연쇄적으로 닫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효재·최민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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