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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평생 시달린 ‘빨갱이 가족의 한’ 그림으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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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참여연대 갤러리 ‘초대전’ 박진수 화백



한겨레

박진수 화백이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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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슬프다. 그리고 거칠다. 화폭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바라기의 고개가 아래로 처져 있다. 시들고 있다. 그런 화폭 한켠에 흰색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다. 왜소하다. 구부정하다. 손에 지팡이도 들고 있다. 힘들어 보인다. 안경을 쓴 얼굴 표정도 어둡다. 햇빛을 그대로 받은 채 할머니는 뭔가를 기다린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입니다. 동생 집에 계시다가 몸이 아프셔서 모시고 오던 길이었어요. 고속버스터미널에 앉아 계실 때 스케치한 모습입니다. 해바라기는 집 앞에 외롭게 피어 있었어요. 서로 다른 공간의 어머니와 해바라기를 함께 그렸어요.”

지난 11일 인천의 화실에서 작업 중인 그림을 설명하는 박진수(81) 화백의 목소리가 떨린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림 한켠의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속삭이는 것 같다. “애야 난 괜찮아.”

‘빨갱이의 아들’은 평생이 고달팠다. 너무도 진한 ‘주홍글씨’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살기 위해 선택했던 직업은 셀 수가 없다. 간신히 들어간 직장엔 3개월 이상 다니기 어려웠다. 사장이 불러 미안한 듯 “내일부터 안 나왔으면 좋겠네”라고 말하며 약간의 돈이 든 봉투를 내밀곤 했다. 동향 담당 형사들은 박씨의 뒤를 따라만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취직된 회사의 책임자를 만나 협박 겸 박씨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물공장에도 다녔고, 목수 일도 했다. 심지어 물고기도 양식했다. 평생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를 한번도 원망한 적은 없다.

박 화백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 ‘인텔리’였다. 교사였던 아버지(박두복)는 교원노조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방된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약했다.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공산주의자’로 투옥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런데 부친이 월북했다가 1965년 간첩으로 남파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루아침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이효정)는 일제 때 동덕여고보를 나와 6·10만세 등 독립운동을 했다. 전쟁통에 사라진 남편 때문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이육사 선생이 어머니 쪽 친척이었고, 친가·외가 모두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박 화백의 작은아버지는 ‘간첩 동생’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시달리다 끝내 음독자살했다.

부모 모두 일제 때 독립운동 ‘인텔리’
전쟁중 행불된 부친 ‘남파간첩설’

모친은 고문 후유증…숙부는 자살
담당형사 감시에 학업도 취업도 불가

주머니 스케치북 들고 다니며 ‘독학’
“깊이 알 수 없는 슬픔·환희 화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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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수 화백의 그림 <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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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수 화백의 그림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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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릴 적부터 형사들은 한밤중에 집안에 들어와 무차별 발길질을 해대곤 했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따돌리며 괴롭히는 동네 아이들의 횡포 속에 청소년기는 공포스러웠다. 잘 먹지 못해 젊은 시절 내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수십번 경찰서에 끌려가 남편의 행방을 추궁당하곤 했다. 한번은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졌지만 제때 치료받지 못해 평생 비뚤어진 팔로 살아야 했다.

그러니 그가 미술교육이란 걸 받을 기회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소질이 있었다. 소문이 나 동네 중학교의 선생님들이 교실 환경미화 작업 때 그를 불렀다. 도와주고 남은 도화지와 물감을 얻어와 혼자 그림을 그렸다. 20대부터 늘 주머니 속에 작은 스케치북을 넣고 다녔다. 일상에 지치면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던 슬픔이 떠올라요. 깊이를 알 수 없는 생명의 환희도 느껴요. 그런 본질적인 표현 언어를 경험한 덕분인지 삶에서 우러난 그림이 가능했어요.”

한때 그는 민중미술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민중미술인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학번이 어떻게 되나요?” “네? 전 학번이 없는데요.” 대학 문턱에도 못 갔기 때문이다. “그럼 참여하지 마세요.” 당시 ‘학번이 없는 화가’는 정보기관의 프락치로 의심받던 시대였다.

50대 후반 그는 운영하던 작은 주물공장을 처분하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에는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폐지 가득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미는 노인, 고된 일을 하는 사이 라면을 먹는 노동자, 일회용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허리가 굽은 채 걷는 노인…. 하지만 화사한 꽃잎이 날리는 풍경화도 있다. 어릴 적 자신을 품어준 자연이다.

박 화백은 1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종로 자하문로의 참여연대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연다. ‘시골의 노인이 꽃을 꺾어 드니 온 세계가 봄이로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회에는 유화와 젊은 시절 스케치 작품 등 40여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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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수 화백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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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정규교육이나 면허가 필요한 것 아니잖아요. 예술은 다른 학문과 달리 그 일에 미칠 수 있는 열정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박 화백의 모친은 돌아가기 4년 전인 2006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다. “97살 고령에도 눈감기 며칠 전까지 리영희 선생의 <대화>를 꼼꼼히 읽으셨어요.” 그가 그린 어머니 모습도 이번 전시회에 걸린다.

인천/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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