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리셋’ 펴낸 조광희 변호사 / 주인공 변호사 통해 정치·기업 추악한 거래 추적 / 작가의 전문성·경험 고스란히 녹아 현장감 가득 / “모든 이야기들은 현실에 굴복 않으려는 몸부림”
한명숙 재판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함께 법무법인 원 소속 변호인으로 참여했고 대선 국면에서는 정치 일선을 깊숙이 경험했으며 영화 관련 법률 자문을 하다가 영화사대표까지 맡았던 조광희(51)변호사. 현직 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도 맡고 있는 그가 최근 자신의 법조 정치 영화 관련 경험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장편소설 '리셋'(솔)을 펴내며 소설가로 나섰다.
소설에 이어 그동안 써온 에세이와 칼럼을 모은 산문집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강)까지 잇달아 펴내면서 문필가로 입지를 굳히는 양상이다.
“예전에 비해 좋아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제도나 민주주의가 확립돼 갈수록 권력이 어떻게 할 여지는 점점 줄어들 텐데 아직 충분히 나아가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관계에서 부정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이 별로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나쁜 권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지만 그러한 권력이 상식적으로 용인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 사회는 멀었다고 봅니다.”
소설에선 기업 회장이 유력 정치인을 등에 업고 협잡을 벌이는 가운데 미술관 관장과 언론인도 호출된다. 이들의 부패를 밝히는 데 동원된 이가 강동호라는 변호사다.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될 법한 장르문학에 가깝지만, 지은이의 전문성과 경험을 동원한 구체적인 세목들이 빛을 발한다.
국내에도 법조인 출신 소설가들이 근년 들어 몇몇 등장했지만 이미 서구에서는 의사나 법조인 같은 전문직 작가들의 활약이 활발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아무나 묘사하기 힘든 구체성을 확보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 전문직이라는 배경은 대단히 유리한 입지인 셈이다.
첫 장편소설을 펴내고 소설가로 나선 변호사 조광희. 그는 “21세기 초 실제로 있을 법한 한국 정치와 법조계의 단면을 구현하고 싶었다”면서 “세상과 대결하면서 스스로 빚어온 나 자신의 분신이자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기를 바랄 뿐”이라고 썼다. 이제원 기자 |
조광희 ‘리셋’은 이러한 유리한 배경이 제대로 작동한 작품이다. 권력의 배후에서 조종당하는 듯한 검사와 일전을 벌이는 변호사의 대결 국면이 생생하고, 작품 속에 시나리오 전 단계의 ‘트리트먼트’로 등장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소설 속 액자 형태로 제시되는 이야기의 중심이 ‘리셋’이다. 이 생에서는 거짓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도와주는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와 이들의 ‘리셋’ 행각을 파헤치는 이들 이야기다. 인생을 통째로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이들이 사실 어디 한둘일까. 그렇지만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자신만의 분명한 주관과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들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조광희는 강동호가 목숨을 위협받는 선택의 기로에서 상기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내보인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가치를 답습하려고 하지만, 어떠한 가치도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가치도 그 자체로 옳은 것은 없다. 가치의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면 된다. 여러분은 어떠한 가치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절망하지 말고, 그것을 다행으로 받아들여라. 그것은 여러분이 자유라는 뜻이다.’
동호는 이 가르침에 힘입어 젊은 날 더 이상 허무의 공간을 헤매지 않았다. 주어진 가치가 없다는 것,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고 진술한다. 그리하여 자신은 ‘이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해 보자’는 가치를 선택하기로 했고, 그 선택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맥락이다. 주어진 가치가 미리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누구나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그래서 자유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조광희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부부의 둘째 아들로 당시로서는 서울 변두리인 ‘모래내’ 개천가에서 태어났다. 내향적인 성격인 데다 서울 변두리에서 겨우 살아가는 아이의 아픔과 결합된, 중심에서 밀린 듯한 경계인의 성정이 내면의 바탕 정서를 이루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는 결단을 내려 도시에서 나름 성공을 거두어 임종 직전에는 ‘괜찮은 삶’이었다고 술회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아스팔트 소년’의 정서로 내내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원을 마저 다닌 뒤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변호사를 시작하면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사무차장으로 봉사도 했다. 영화 관련 법률 자문을 하다가 많은 영화인들과 어울리면서 영화사 ‘봄’ 대표를 맡기도 했다. 2012·2017 대선국면에서는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치에도 참여했다. 경계인의 정체성으로 격렬한 정치판에서 버티는 일이 만만했을까.
“제가 당사자라면 견디기 쉽지 않았을 텐데 도와주는 입장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봅니다. 몇 번 겪어보니까 확실히 제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군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정치판에 맞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다행히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쪽에 갔다가 상처받고 바보가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친 듯이 달리면서 한쪽은 모든 수단을 다 쓰겠다고 작정하는 판에 다른 한쪽은 원칙을 고수한다면 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피차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거지요. 거기서 겪다 보면 비슷하게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결국 도태돼 있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비슷한 사람들만 남게 되는 거죠.”
이번 소설에 대한 주변의 평은 한결같이 ‘영화 같다’는 것인데, 반드시 좋은 평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흥미롭다는 이구동성에 다분히 격려를 받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을 계속 써볼 작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너무 폼 잡지 않고 어렵지 않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춰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번 소설에도 산스크리트어 표기법이나 푸코와 라캉 이야기도 살짝 등장하지만 흥미를 돋우는 양념으로 삼을 따름이다.
인공지능이 대거 등장하는 근미래의 법적 윤리적 문제야말로 그가 다루어볼 수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에서 이와 관련된 차기 소설을 이미 준비하는 중이다.
그는 소설 연극 영화를 막론한 모든 이야기들은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데도 기어이 현존하고 마는 이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야유”라며 “현실의 완고한 관성에 언제나 복종하고 마는 무력한 자신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소망”이라고 산문집에 정의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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