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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왜냐면] 의자는 사람 같다 -4·27 남북정상회담에 부쳐 /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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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진우
건국대 디자인대학 교수

나는 의자가 사람 같다. 어떤 의자는 늘 주인공이고 싶어 하고, 어떤 의자는 조연에 만족한다. 어떤 의자는 독야청청 홀로 존재하고, 어떤 의자는 무리지어 존재한다. 어떤 의자는 예쁘긴 한데 가까이 가긴 부담스럽고, 어떤 의자는 평범하지만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다. 어떤 의자는 한 세기가 넘도록 꾸준히 사랑받고, 어떤 의자는 요란하게 데뷔했다 금세 사라져 버린다.

의자 등받이의 높이와 장식은 앉는 자의 권위와 권력의 위계질서를 대변한다. 휘감은 재료와 색채가 의자의 가치와 값어치를 결정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에 놓인 의자의 모양으로 주인의 성향을 짐작하곤 한다. 놀랍게도 의자는 주인과 닮는다. 그래서 의자를 관찰하는 일은 사람을 관찰하는 일처럼 흥미롭다.

얼마 전 우리는 4·27 남북정상회담의 전 과정을 생중계로 봤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인 하루였다. 나는 남북정상회담의 하루를 복기하며 사람 대신 의자에 주목해 봤다. 정상회담장 테이블은 폭이 2018㎜인 타원형이었다. 2018이라는 숫자와 변형이 적은 호두나무 물성의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형태다. 사각형 테이블과 달리 원형 테이블은 함께 앉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거나 서열을 두지 않는다. 중요한 자리, 구석 자리, 끝자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와대도 테이블 선정의 이유를 “동그랗게 둘러앉아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목욕탕에서, 수영장에서, 잔디밭에서 원을 만들어 앉는 것처럼, 둘러앉는 행위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왜 정원이 아니고 타원이었을까? 무엇보다 2018의 의미를 접목하고 싶었을 거다. 최대 14명이 앉을 원형 테이블 지름이 2018㎜라면 너무 작다. 한쪽은 길어져야 했다. 테이블이 타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더 있다. 회담 장소에는 “허심탄회”할지언정 어느 정도의 “서열”이 필요했다. 두 정상이 앉을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는 구별돼야 했다. 서열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의자들에 의해 더 분명해진다. 정상들의 의자는 좌우에 3개씩 배치됐던 다른 의자들과 달랐다. 형태는 동일했지만 크기와 색상으로 차별화했다.

의자의 디자인을 보자. 어깨까지 올라오는 높은 등받이, 각지고 둔탁한 팔걸이, 무엇보다 좌판의 크기와 동일한 지점에서 아래로 내려온 4개의 다리는 무겁고 둔하다. 대화 도중 정말 허심탄회하게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의자를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 테이블은 사각에서 타원으로 변하며 탈권위를 시도했지만 의자는 그러지 못했다.

진짜 허심탄회한 의자는 도보 다리 위에서 등장한다. 101번째 군사분계선 표지물 바로 옆, 고동색 원형 테이블과 두 개의 벤치. 이들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두 정상만의 밀담 장소를 빛낸 완벽한 조연이었다. 그들은 눈에 띄고 싶지 않았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세계는 그들을 주목했다. 두 정상이 앉아 있는 사진으로 보아 테이블의 지름은 약 800㎜ 정도. 상대방의 표정, 눈빛, 음성을 느끼고 감지하기에 편한 거리다. 게다가 두 정상은 테이블에서 가장 먼 곳이 아닌 좀 더 짧은 위치, 벤치의 중앙이 아닌 끝에 앉아 있다. 한 뼘이라도 가까이 앉으려는 두 정상의 신뢰와 친밀감이 느껴진다.

의자 깊숙이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 비해 의자 끝에 걸터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김 위원장의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북한 사람들을 늑대나 빨갱이로 배웠던 세대인 내게 그 장면은,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서두에서 나는 의자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반대도 가능하다. 허심탄회한 만남을 원한다면 허심탄회한 의자를 사용하면 된다. 어깨에 힘을 뺀, 너무 무겁거나 화려하지 않은, 필요하다면 손쉽게 움직여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의자,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삶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의자들이,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정상회담장에 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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