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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반백년 반모임 하자"…팔순 은사 곁 지키는 耳順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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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까까머리에서 백발로…
1977년 당시 마산고등학교 3학년 10반 학생이었던 제자 30여 명이 옛 담임교사 최낙인 씨(80·윗줄 왼쪽 다섯째) 생일을 맞아 지난 1월 6일 서울 서초구 한 음식점에 모였다(위 사진). 1977년 학생들과 최낙인 선생이 함께 찍은 학급사진. [사진 제공 = 박정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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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소년은 꿈이 없었다. 명문고에 진학했다는 자부심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장인 할머니를 여의면서 끼니와 거처를 걱정해야 하는 책임감에 묻혔다. 대학 진학 대신 하위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은 소년가장에게 손을 내민 것은 3학년 담임교사였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던 선생님의 아들 방에 더부살이하며 대입 리그를 완주한 소년은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등록금 마련과 거주지 걱정을 해야 했던 제자에게 선생은 친지들을 통해 가정교사 자리를 주선했다. 지금은 의대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성장한 옛 제자는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 인사를 받는 대신 옛 스승을 찾는다.

경상남도 마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퇴직한 최낙인 선생(80)과 한 제자의 얘기다.

1977년 최 선생을 담임으로 맞았던 마산고등학교 37기 3학년 10반 학생들은 1978년 2월 졸업 이후 41년째 매년 스승의 날마다 은사를 찾는다. 이순(耳順)의 나이가 된 올해 5월 15일도 마찬가지다. 멀리 거주해 경남까지 가기 어려운 제자들은 정성을 모아 꽃이라도 보내야 마음이 놓인다. 또래들이 교감·교장을 마치고 정년을 앞뒀지만 마음은 영락없는 학생이다.

3학년 10반 반장이었던 이환준 씨(59)는 "어버이 날 부모님 찾아뵙듯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평준화됐지만 1970년대 당시 전국 단위 인재가 지원할 정도로 명문이었던 마산고에 모인 학생들은 좌절감도 성취감도 다른 학교에 비해 컸다. 시험 등수가 한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로 바뀐 학생들은 스트레스에 일반 고등학교 못지않게 많이 싸우고 술도 많이 마셨으며 이성 문제도 많았다. 가정 형편이 안 좋았던 학생들은 상황이 악화되면 아무말없이 학교를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최 선생은 매를 들기보다는 항상 먼저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노력했다. 남모를 이유를 꺼내 놓을 때마다 그는 학생들을 따로 불러 때로는 호되게 꾸짖고, 때로는 인자하게 감쌌다.

저마다 최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씩 품은 제자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1년이 지난 올해까지 따로 모여 그의 생일을 챙겼다. 선생의 팔순을 맞아 3학년 10반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그 구심점으로서 최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우러러 보며 굽어보며'라는 제목의 학급 문집도 냈다. 원래 급우들의 짧은 글을 묶어 간단히 내려 한 것이었지만, 사연을 알게 된 출판사 한 임원이 '더 크게 내보자'고 제안해 291쪽짜리 단행본이 됐다고 이씨는 전했다.

최 선생은 기자와 전화통화하면서 "40년간 선생 일 한 사람이라면 으레 했을 일들"이라고 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 정국이 혼란하고 사회적 부정이 많았던 1950~1960년대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거짓말은 절대 안 된다'는 원칙만 가지고 40년간 교직 생활을 해 왔다는 최 선생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고 겸손해 했다.

기자가 따로 만난 사제는 학생 인권과 교권이 부딪치는 최근 세태에 대해 '배려'와 '진심'이라는 같은 답을 내 놓았다. 최 선생은 최근 교실 붕괴 현상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따뜻한 정과 이타심이 사라져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 오히려 교사가 학생 인권을 말하고 학생이 교권을 주장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씨 역시 "사제 지간이 우리 3학년 10반과 최 선생님처럼 부자지간이 될 수도 있는 인연인데 요즘에는 그런 일이 점점 줄어가는 것 같아 아쉽다"며 "그러나 언론에 나오는 극단적인 사례는 전체 중 극소수일 것이며, 대다수 한국 사람은 우리처럼 스승에 대한 공경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씨는 "그런 부분들이 더 부각되고 사람들도 계속해서 스승에 대한 사랑을 말로,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사제 간 사랑이 사회를 다시 데우는 날이 올 것"이라며 웃었다.

[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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