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동학ㆍ유학ㆍ노자ㆍ기독교ㆍ간디 등
동서양 고전사상 창의적 접목
인간ㆍ자연 공생 추구한 사상 일궈
#생명사상 기반 공동체 운동
1983년 도농 직거래 ‘한살림’ 창립
경쟁ㆍ권력의 원리를 넘어서
상호 협력하는 대안의 삶 추구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가르침
무한경쟁ㆍ물질문명 한계 도달해
개인과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는
‘연대적 개인주의’ 모색해야
1970년대에 이미 생명운동을 벌였던 장일순. 김지하, 김종철 등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나 남긴 저작은 2권 정도에 불과하다. 무위당 기념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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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이 사회 구성원 다수가 지향하는 가치의 집약이라면, 지난 100년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은 독립, 산업화, 민주화였다. 이 시대정신은 사상 및 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산업화를 위한 발전국가, 민주화를 위한 민주주의는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상 및 지성의 주제였다. 현대 한국 지성사는 민주주의ㆍ발전국가ㆍ민족주의를 향한 사상의 모험이었다.
주목할 것은 민주주의ㆍ발전국가ㆍ민족주의가 지난 100년 지성사의 모든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환경 파괴를 비판한 생태주의, 가부장제에 맞서 성평등을 요구한 페미니즘, 이기적 개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공동체 사상 또한 우리 지성사를 풍요롭게 했다. 이러한 생태주의와 공동체 사상을 선구적으로 일군 이가 장일순이다.
장일순은 두 가지 점에서 이채로운 사상가다. 첫째, 그는 저작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녹색평론’이 펴낸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와 목사 이현주와 나눈 대담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장일순의 생각이다. 그가 책을 쓰지 않은 까닭은 자신의 글이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 피해를 줄지 모른다고 배려했고, 글보다는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일순은 글이 아니라 말을 남긴 인류의 오래된 사상가들과 닮아 있다.
둘째, 장일순의 생각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시인 김지하와 ‘녹색평론’ 편집인 김종철의 생명사상은 물론 협동조합을 포함한 공동체운동은 장일순 사상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장일순은 평생 서예가와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자본주의 문명이 한계에 도달한 현재, 그가 남긴 생명사상은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거룩하고 평등한 생명
장일순은 1928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났다. 1946년부터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원주로 돌아와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1961년 5ㆍ16쿠데타 직후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협동조합운동을 벌였다.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그는 1977년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1983년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했다. 이후 그는 활발히 생명사상을 전파하고 생명운동을 전개하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의 부제는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다. 장일순이 남긴 글, 강연, 대담을 모은 것이다. 1997년 초판이 나왔고, 2016년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이 책에서 글과 강연은 150쪽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분량이 적다고 해서 사상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장일순으로부터 생명사상을 배운 김지하는 장일순의 사상적 거처가 동학, 유학, 노자, 기독교,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사상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최시형의 동학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이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영원한 생명의 자리가 자기 안에 있다는 최시형의 사상은 장일순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동양과 서양의 고전 사상들을 장일순은 창의적으로 접목해 생명사상으로 탄생시켰다.
장일순의 사상적 적자라 할 수 있는 김종철은 장일순의 생명사상을 모든 생명의 거룩성과 평등성을 받아들이는 사상으로 요약한다. 장일순은 말한다.
“산업문명이 인간을 파괴하고 생태계마저 파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닌가. 돌 하나, 풀 한 포기의 존엄성도 인정해주어야 해. (...) 동학에서도 경물(敬物)ㆍ경인(敬人)ㆍ경천(敬天) 사상을 얘기했지 않나. (...)자연과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자연이나 인간이나 다 자연이야. 자연과 인간이 다 존경 받는 그러한 속에서 일원론으로 돼야 해. 전부가 하나가 돼야 해.”
인간은 물론 자연을 존중하고 이 둘의 공생을 추구한 사상가가 바로 장일순이다. 장일순의 통찰은, 생물과 무생물 모두가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설파한 ‘산처럼 생각하라’의 알도 레오폴드와 아르네 네스의 생태학을 떠올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장일순이 도달한 생명사상이 다양한 동서양 사상들의 탐구에 기반한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는 점이다.
장일순의 생명사상이 갖는 의의는 한국 현대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계몽한다는 데 있다. 현대성이 추구해온 민족자결, 경제성장, 민주주의를 마다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대성은 국가주의, 환경 위기, 관료제 심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성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그 그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과 사회의 방향을 장일순은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을 공경하는 생명사상에서 찾았다.
생명사상과 공동체운동
장일순의 사상은 협동조합에서 공동체운동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과 늘 결합돼 있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농민운동가 박재일과 함께 한살림에 주력했다. 한살림의 사상적 기반은 장일순의 생명사상이다. 장일순이 중시하는 것은 ‘호혜(互惠)의 원리’다. 호혜의 원리는 시장의 ‘경쟁의 원리’와 국가의 ‘권력의 원리’와 구별된다. 그것은 상호 협력과 공존을 강조하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과 사회발전을 추구한다.
공동체운동에 대해선 그 실현가능성과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분화와 복합성이 고도로 증대된 현대사회에서 호혜의 원리에 기반해 전체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공동체운동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한다. 공동체운동이 새로운 대안의 하나로 주목 받는 까닭은 자본주의 문명이 그 한계에 도달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파괴하고, 약육강식(弱肉强食)ㆍ적자생존(適者生存)ㆍ각자도생(各自圖生)을 강제해 왔다.
공동체 사상과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맞서는 대안적인 철학적ㆍ정치적 기획이다. 이 사상과 운동의 목표는 우리 삶을 황폐화시키는 경쟁의 원리와 권력의 원리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하는 데 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를 넘어서 모든 생명들이 존중 받는 사회를 일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을 것이다.
“나락 한 알 속에도 (...)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너희들 속에 생명에 대한 신념이 요 만큼이라도 있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들에 피는 그 조그만 꽃 속에 무한함이 있다”고 장일순은 말한다. 사람이 먼저고, 자연이 먼저고, 생명이 먼저라는 장일순의 가르침은 현재보다 미래에 더 의미 있는 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동체의 미래
장일순이 남겨준 사상적 화두는 생명, 공동체, 동서양 사상의 융합 등 다양하다. 한살림에서 볼 수 있듯 장일순은 공동체를 위한 생각을 가다듬고 실천을 모색했다(생명사상의 미래에 대해선 김종철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를 다룰 때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날 공동체의 의미는 재발견되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를 억압했지만, 최근 각자도생의 사회는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다. 서구 사회에서 마이클 왈저 등은 존 롤스의 자유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을 펼쳤고, 로버트 퍼트넘 등은 네트워크의 사회적 자본을 주목해 공동체적 유대의 회복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농부작가 전우익의 말이 상징하듯, 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적 화두가 되고 있다.
누구는 공동체가 소박한 대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비판에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한경쟁 및 소비를 부추기는 물질문명을 쇄신하지 않는 한 현대사회가 지속 불가능한 것은 분명하다. 환경 위기에서 기후 변화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문명은 일대 전환을 요청 받고 있다.
공동체의 재발견이 중요한 까닭은 사회의 재구성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개인들의 계약에 기반을 두는 공적 조직이자 그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네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러니 함께 풀어가자’의 응답은 공동체로서의 사회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존재적 조건이다.
지난 100년을 마감하는 현재,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연대는 결코 양도할 수 없는 두 가치다. 이 둘을 생산적으로 공존시키고 결합하는 것을 나는 ‘연대적 개인주의’라 부르고 싶다. 이 연대적 개인주의야말로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시대정신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김구의 ‘백범일지’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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