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9 (일)

‘하얗고 높다란’ 무덤의 정체... 칭기즈칸에 멸망한 200년 제국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54>황하 답사 ⑥중화황하단, 청동협, 서하릉
한국일보

중국 서부 닝샤후이족자치구 인촨의 서하릉 3호릉. 당항족이 세운 서하 개국 황제의 무덤이다.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8세기 중엽 안녹산의 반란으로 당나라 현종이 황궁을 버린다. 피난을 떠나자마자 양귀비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정변이 발생한다. 망국의 근원을 제거하고 태자 옹립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친위 쿠데타다. 현종은 황제의 지위를 넘기고 서남부 청두로 도피한다. 태자는 서북 방면 영주(靈州)로 군대를 이끌고 이동한 후 즉위한다. 11세기에 이르러 당항족(党項族)이 건국한 서하의 영토가 된다. 지금의 닝샤후이족자치구 우중(吳忠)이다. 황하가 휘감고 지나는 요지다. 2011년 5월 국제문화예술여행박람회 당시 거창한 건축물인 중화황하단(中華黃河壇)을 세웠다.

'황하오천년' 역사 훑는 중화황하단

한국일보

우중 중화황하단의 구문십주 패방.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황하에 대한 경배와 제례가 명분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황실 족보 어디에도 없던 구문십주(九門十柱) 패방이 나온다. 해와 달이 액방(창이나 문틀 위 벽의 하중을 받쳐주는 구조물)의 태양문과 월량문으로 둔갑했다. 10개의 기둥 위 대접받침에는 동서남북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새겨져 있다. 기둥 끝에도 10마리의 망천후(望天犼)가 노려보고 있다. 온 세상 황하 후손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 강의 바람이 담긴 설계다. 중화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으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게 된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 비림의 굴원, 소식, 이백 시비.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비림대도(碑林大道)로 연결된다. 황하를 노래한 시인의 시비가 도열해 있다.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인 거북 형상의 비희(贔屓)가 짊어지고 있다. 모두 18편이다. 전국시대 굴원이 초나라 민간 풍속을 노래한 구가(九歌) 중 하백(河伯)이 눈에 들어온다. ‘여녀유혜구하(與女遊兮九河)’로 시작해 ‘어린린혜잉여(魚鱗鱗兮媵予)’로 마친다. 황하를 아홉 구간으로 나눈 강이 구하다. ‘그대와 구하에서 노닐 때, 물고기들 모두 줄지어 동행하네.’ 황하를 노래한 소식과 이백도 보인다. 두보, 백거이, 왕안석, 왕지환 등 천년을 빛낸 시인들이 줄줄이 감성을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의 '황하오천년' 역사를 동으로 부조한 조벽.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72m에 이르는 조벽이 설치돼 있다. '황하오천년' 역사를 전부 담았다. 복희와 여와를 시작으로 삼황오제, 하상주, 오패칠웅의 춘추시대, 진나라 통일 이후 청나라까지 사건과 인물이 총망라돼 있다. 동으로 부조한 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씩 살피며 사서를 넘기듯 보노라니 시간이 꽤 걸린다. 뒷면은 문자다. 경서, 사서, 제자, 문집인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참조한 1만8,000자다. 부조와 서체로 만난 역사 수업이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의 24절기 기둥과 18왕조 석고.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의 예은 패방.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은(思恩) 패방이 이어진다. 어머니 강인 황하에 대한 존경과 예우다. 직진해 다리를 건너니 농경대도(農耕大道)가 펼쳐진다. 24개의 기둥에 농경문화의 절기를 표현하고 있다. 18개의 석고에는 왕조에 대한 요약이 적혀 있다. 예은(禮恩) 패방이 나타난다. 기둥 위에 묘음조(妙音鳥)가 하늘을 향해 비상할 듯 앉았다. 불교를 숭상한 서하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가릉빈가(迦陵頻迦)다. 상반신이 사람인 인도 신화 속 새다. 기둥 아래에는 대역사(大力士)가 새겨져 있다. 사찰이나 석굴에 흔하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의 사모무정.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중화황하단에서 본 황하.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청동 죽간을 세워 서적을 적었다. 오른쪽에는 논어, 맹자, 시경, 주역 등이 있고 왼쪽에는 도덕경, 산해경, 손자병법, 제민요술 등이다. 상나라 청동기 유물로 안양에서 발굴된 사모무정(司母戊鼎)이 보인다. 종(鐘)과 고(鼓)도 있다. 모두 18개의 청동 제례 용기가 있다. 술병과 술잔 이름이 그만큼 다양하다. 해시계 일구(日晷)와 옛날 수레인 지남차(指南车)도 전시돼 있다. 999m에 이르는 중화황하단이다. 남쪽으로 누렇게 변장한 황하가 모퉁이를 돌아 흐르고 있다.

108탑으로 남은 서하의 불교문화, 청동협

한국일보

청동협 저수지 유람선 부두.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우중 청동협 108탑.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황하 물줄기를 따라가니 청동협(青銅峽)이다. 20년 공사 후 1978년에 준공한 저수지가 나온다. 유람선이 10분가량 상류로 올라 협곡 서쪽에 접안한다. 배에서 내리니 산자락에 빼곡하게 꽂힌 탑이 보인다. 현존하는 최대의 고탑군(古塔群) 108탑이다. 불교 부흥을 위해 서하가 건축했다. 가장 아래에 19개, 2개씩 줄어들다가 두 개 층은 5개와 3개, 가장 위는 1개다. 모두 12행으로 정삼각형 형태를 갖춘 모양새다.
한국일보

청동협 향로 사이로 바라본 108탑 일부.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청동협 108탑의 위층.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향로 틈새로 바라보니 비밀이라도 담긴 듯하다. 토번(티베트)과의 교류로 영향을 받은 불탑이다. 기단은 팔각형과 십각형 두 종류다. 탑신도 네 종류다. 얼핏 보면 비슷비슷한데 행마다 모양이 다르다. 저수지 공사 중 탑 안에서 발굴한 유물이 많다. 벽돌 불상과 천불도, 경전도 발견됐다. 닝샤박물관과 베이징고궁박물원 등이 소장 중이다. 꼭대기에 홀로 우뚝 선 불탑이 있다.
한국일보

청동협 108탑 가장 꼭대기 1행의 001호탑.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청동협 108탑.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청동협 108탑과 황하.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2행의 계단을 오른다. 볼수록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다. 천년 세월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1행 자리의 001호탑 앞에 선다. ‘대장 불탑이구나’ 읊조린다. 5m 높이다. 다른 불탑이 평균 2.5~3m이니 높은 위치에 높다랗게 자리 잡았다. 불감 안에서 18.5cm 크기의 불상을 출토했다. 엄마 품속 아가처럼 숨어 있었다. 귀엽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불탑과 함께 흐르고 흐른 황하의 세월을 생각한다. 천년 불탑이 아닌가?

둔황 유림굴 벽화 재현한 서하릉박물관

한국일보

서하 시대의 형세를 보여주는 인촨 서하릉박물관의 지도.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 1시간 거리의 인촨(銀川)으로 간다. 닝샤후이족자치구 수도로 서하의 도성이었다. 서하릉(西夏陵) 유적지로 찾아간다. 입구를 통과하니 박물관이 나온다. 북쪽으로 요나라, 동남쪽으로 북송, 서남쪽으로 토번, 서북쪽으로 회골(위구르)과 함께 영토를 다투던 시대다. 당시 형세 지도를 곰곰이 살펴본다. 당나라 말기 황소 민란 토벌에 공을 세운 당항족 가문이 득세한다. 1028년에 이르러 서하를 건국하고 189년 동안 서북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했다. 불교를 숭상한 왕조였다.
한국일보

인촨 서하릉박물관의 불교 유물, 가릉빈가와 나한두.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붉은빛 감도는 도기로 제작한 가릉빈가가 보인다. 통통한 얼굴에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은 인간의 형상이다. 새의 날개와 꼬리가 몸에 붙었다. 둔탁한 듯해도 세련된 조형미가 보인다. 2001년 서하릉 3호릉에서 발굴됐다. 1990년 황하 근처의 허란현(賀蘭縣)에서 출토된 나한두(羅漢頭)도 있다. 둥근 얼굴에 눈과 코, 입 모두 호탕한 인상이다. 부처처럼 귀가 길고 인자하다.
한국일보

과저우 유림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서하릉박물관에 과저우 유림굴 3호굴의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 1,300km 떨어진 과저우(瓜州)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둔황 근처 유림굴(榆林窟)이 있다. 유림굴 2호, 3호, 25호 석굴은 서하 예술의 극치라 평가된다. 특별 관리하는 석굴이라 비싼 입장료를 내고 별도 관람 신청을 해야 한다. 어렵사리 관람했지만 촬영이 금지된다. 서하릉박물관이 똑같은 크기로 재현했다. 3호굴은 51면 천수관음 벽화로 유명하다. 입구 양쪽 벽면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화면마다 풍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모형과 실물 모두 흥분되긴 마찬가지다.
한국일보

서하릉박물관에 전시된 유림굴 2호굴 수월관음 복제품.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호굴도 재현돼 있다. 서쪽 벽면에 그려진 수월관음(水月觀音)이 생생하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이 사는 성지에 찾아가 해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비 넘치고 온화한 모습의 관음보살에 대한 변상도(變相圖)다. 부처의 전생이나 불경의 내용을 발현한 그림이다. 관음보살의 수많은 화신 중 하나인 수월관음은 중생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다. 진품은 아니지만 직접 보니 영광이다.
한국일보

서하릉박물관에 전시된 서하 문자.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희한한 글자를 만난다. 이원호는 서하 제1대 황제에 오른 후 문자 창제를 지시한다. 개국공신으로 학자인 예리런룽이 주도한다. 한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창제한 기호가 많다. 부호를 합치고 뜻을 연결해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한자만큼 획수가 복잡하다. 약 5,800자를 제정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난해한 암호다. 패망 후 당항족 일부가 남하해 티베트 동부로 이주했다. 티베트 민족에 동화돼 살아온 무야인(木雅人)이다. 낯선 무야인 방언에 서하 언어가 남아있다.

당항족 영화 고스란히 남은 서하릉

한국일보

인촨 서하릉 입구.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하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간다. 서하릉 위에 서하 문자가 보인다. 어떻게 읽는지, 무슨 뜻인지 궁금해진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서하문 학자인 리판원이 구축한 사전 DB를 제공한다. 첫 글자는 팡(龐)이나 펑(逢)으로 읽고 눈과 비슷한 색깔인 희다(白)는 뜻이다. 둘째 글자는 밍()으로 읽고 높다(高)는 뜻이다. 마지막 글자는 라오(牢)라 읽고 무덤(墓)이다. 서하 사람들은 ‘하얗고 높다란 무덤’을 팡밍라오라 했을 법한 해석이다. 이원호 무덤인 서하릉 3호릉으로 간다.
한국일보

인촨 서하릉과 하란산.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서하 개국 황제 이원호 무덤인 서하릉 3호릉.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쿤룬산맥 끄트머리 하란산(賀蘭山)에 서하 황제 9명의 능원이 조성돼 있다. 부장묘도 271좌다. 3호릉은 개국 황제 이원호의 능원이다. 15만㎡ 규모다. 가장 크고 잘 보존된 편이다. 산자락 아래 양지바른 땅이다. 외성과 옹성인 월성, 내성으로 골격을 갖췄다. 외성을 기준으로 남북 360m, 동서 250m 규모다. 흙으로 쌓은 성곽은 많이 무너졌으나 윤곽은 남아있다. 중앙 통로로 접근하는데 뒷산을 다 덮을 정도로 봉분이 높다. 햇살을 머금어 하얗게 높이 솟은 느낌이다. 당항족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렇다.
한국일보

서하릉 3호릉의 월성문.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서하릉 3호릉 신도의 석상생.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거의 무너진 월성문을 지난다. 모래와 흙을 틀에 넣고 다진 후 담장을 쌓았다. 담장이 안타까운 모습으로 잔존해 있다. 비바람이 오랜 시간 쏟아졌으니 모래와 흙은 사라졌다. 여전히 단단히 남아 역사를 증언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능원에는 신도(神道)가 있어 주인을 수호하는 문신과 무신, 기린과 코끼리 등을 배치한다. 모두 사라지고 잔해만 남았다. 철근으로 복원하고 철조망으로 엮으니 살아있는 듯하다. 석상생(石像生)이라 한다. 얼굴 반쪽과 오른팔만 살아 지금도 주인을 섬기고 있다.
한국일보

서하릉 3호릉 헌전의 능탑 복원도.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성으로 들어서니 헌전(獻殿) 위치가 비정돼 있다. 성문에서 약 30m가량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전각 길이는 18m, 너비는 12m로 추정한다. 벽돌과 기와, 장식이 대량 발굴됐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인 헐산식(歇山式) 전각이라 짐작한다. 능탑도 존재했다. 복원된 모습을 유리창에 그려 능원 앞에 세웠다.
한국일보

서하릉 3호릉 능원 설명문.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서하릉 3호릉 능원.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능원 앞에 봉긋한 봉토가 있다. 묘도(墓道)다. 물고기 배처럼 생겨 어척량(魚脊樑)이라 부른다. 42m에 이르고 약 2m 높이다. 입구는 단단한 서까래를 두고 땅을 파고 흙과 돌로 덮었다. 능원으로 가까이 갈수록 경사가 높은 비탈이라 진입이 쉽지 않은 구조다. 평범해 보이는 능원이나 설계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칭기즈칸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주변 왕조와 경쟁하며 살았다. 교류도 하며 문화를 향유한 왕조다. 개국 황제의 능원에 서니 서하의 영화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작가 pine@youyue.co.kr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