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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北은 5·10 총선 저지하려 '남북정당·단체 연석회의'… 소련이 의제부터 南측 인사에 대한 대우까지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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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 5·10 총선, 민주주의 첫발

5·10 총선을 한 달도 안 남겨둔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렸다. 남한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한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695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된 회의는, 김일성과 박헌영·백남운으로부터 정세보고를 들은 뒤 토의를 거쳐 23일 "남조선 단독선거 배격 운동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겠다"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연석회의가 끝나자 남·북한 유력 인사 15인이 참석한 '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회담)'와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이 열렸다. 남북요인회담은 30일 '미·소 양군 즉시 철퇴, 단독선거 반대' 등을 담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김구·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 계속, 연백수리조합 개방, 조만식 월남 허용'을 요구해 앞의 두 가지에 대한 수락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북한은 두 김씨가 남한으로 돌아가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끊었다.

이 남북협상은 통일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25군 군사위원으로 정치공작을 지휘했던 레베데프 소장의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자 연석회의의 준비부터 진행까지 모든 상황을 소련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남한 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한 대표자회의를 열도록 김일성에게 권고하고 의제까지 정해줬다. 회의 진행 방법과 돌발사태 대응법, 김구·김규식에 대한 대우 등을 자세히 지시했고, 회의 결정에 대한 소련의 '조언'은 연석회의 결정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북한은 단독정부를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한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정부 수립을 향한 독자적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했고 이어 헌법 초안을 발표했으며 남북협상 남쪽 대표단이 아직 평양에 있던 4월 28일 헌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6월 29일 평양에서 제2차 지도자협의회를 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김규식은 남북협상이 성공적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곧 자신들이 북한과 소련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제2차 지도자협의회 참석을 포기했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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