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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오늘과 내일/천광암]김상조-최종구 위원장의 ‘삼성 팔 비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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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행정고시 출신으로 과거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A 씨는 책임 회피의 달인으로 통한다. 그는 나중에 탈이 날 소지가 있는 일은 하위기관에 절대 문서로 지시하지 않았다. 전화로 한 다음, 그 내용을 건의 형식으로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게 했다.

우리 공직사회에는 이와 비슷한 ‘면피용 꼼수’가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정부기관의 위력을 행사해 초법적 조치를 강요하는 창구지도나, 거수기 역할을 하는 각종 위원회 등이 대표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한 수는 규제 대상의 팔을 비틀되 겉으로는 자율이나 자발 포장을 씌우는 것이라고 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주 10대 그룹 경영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 등을 포함한 지배구조 조정을 주문했다. 그는 “결정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해야 한다”며 자율을 앞세웠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김 위원장보다 앞서 삼성전자 지분 처리 방안을 ‘자발적으로’ 마련하라고 삼성을 두 차례나 압박했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보유는 과연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한 것은 1980년 이전이다. 취득원가는 5690억 원이었는데, 삼성전자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주식가치가 27조669억 원(2017년 말 현재 시가 기준)으로 불어났다. 실패한 투자였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됐을 텐데, 역설적으로 성공한 투자여서 일각에 시빗거리를 제공했다.

보험업법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주식을 총자산의 3%를 초과해 보유할 수 없지만 취득원가 기준으로 0.2%에 불과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시가로 치면 9.5%가 되지만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 3% 초과 금지 조항은 부실 계열사에 대한 대규모 자금 지원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입법 취지상 취득원가를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가를 적용하면 고객 돈을 부실 계열사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고 우량 계열사에 투자하면 안 된다는 황당한 모순이 생긴다. 금융위원회도 이런 전후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줄곧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를 적용해 왔다.

최 위원장은 지분 매각 논리 중 하나로 ‘자산 편중 리스크’를 들었다. 풀어서 말하면 삼성전자가 망하면 주주나 계약자들이 피해를 보게 되니 주식을 팔라는 이야기다.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매긴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은 AA―로 일본과 중국의 국가신용등급보다 한 단계 높다. 일본 정부나 중국 정부가 파산할 가능성보다 삼성전자가 파산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초우량자산을 팔아치우고 B, C급 주식으로 다양하게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이 좋은 투자라고 정말로 생각하는지 최 위원장에게 묻고 싶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20조 원이 넘는 매도 물량이 주식시장에 쏟아지면 공급 과다로 인한 주가 폭락 등 엄청난 후폭풍이 따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노후자금을 삼성전자 주식에 23조 원 이상 묻어둔 국민연금도 안녕하지 못할 것이다. 삼성의 자율과 자발을 강조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뇌리에 ‘이런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나는 지고 싶지 않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자기책임이라면,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권한과 책임의 조화다. 자율과 자발로 포장된 ‘팔 비틀기 행정’은 시급히 사라져야 할 후진(後進) 행정의 유산이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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