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교육의 미래를 말하다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 |
◇폭넓은 학문 기반 갖춘 융합인재 길러야
앞으로 20년 후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신성철(66) 카이스트 총장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AI 로봇인 로보 사피엔스(Robo Sapiens)가 절반씩 존재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 총장은 "로보 사피엔스는 기억력, 정보 처리·계산 능력, 운동 능력 등 기능적 측면에서 인간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라며 "인간이 이들과 공존하려면 인간만의 정체성을 계발하는 '가치 중심 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공학도에게도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은 연구 중심 평가 제도 탓에 학부교육이 부실한 데다 계산력·논리력을 키우는 교육에 치중하느라 인문학적 교육이 미흡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문승현 지스트 총장 |
문승현(61) 지스트 총장의 생각도 이와 같다. 컴퓨터·AI가 할 수 있는 것, 온라인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지식을 더는 대학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문 총장은 "앞으로 대학에선 '구글에 없는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지금까지 과학기술자들이 '만들어진 문제'에 익숙했다면 미래를 이끌 융합 인재에게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해요. 그런 능력을 길러주려면 학생들에게 교과 학업 외 다양한 일에 도전하며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많이 줘야 합니다."
/손상혁 디지스트 총장 |
그렇다면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이 길러야 할 인재는 어떤 사람일까. 손상혁(65) 디지스트 총장은 학문적 기반이 넓은 'π(파이)형 인재'를 꼽았다. "지금도 얼핏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분야들이 서로 접목돼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데, 앞으로 닥칠 초연결·초지능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할 거예요. 이런 시대에는 전공의 경계를 넘어 종합적으로 사고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죠."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장 |
이들이 주목하는 미래 인재의 또 다른 덕목은 바로 '협업력'이다. 각 대학이 '팀 프로젝트'형 수업이나 활동을 속속 도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차국헌(60) 서울대 공과대학장은 "예컨대 메이커 스페이스에서 산업디자인과 학생과 기계공학과 학생이 팀을 꾸려 공작하고, 경영학과 학생과 화학공학과 학생이 창업 클래스를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게끔 했다"며 "다양한 전공의 학생 교류를 활성화해 '상상 밖의 일을 해내는' 인재로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 |
◇이공계大 연구 성과, 창업·창직으로 이어져야
이공계 대학 수장(首長)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건 또 있다.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대학의 교육·연구 성과가 창업(創業)과 창직(創職)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김도연(66) 포스텍 총장은 "공과대학은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돈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인큐베이터"라며 "이공계 중심 대학이 연구를 활용해 미래 먹을거리를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富)를 창출하는 기술력은 곧 국력입니다. 미국 스탠퍼드·MIT 등은 인재를 양성하는 동시에 활발한 산학협력과 기술 기반 창업으로 엄청난 부를 만들어냈어요. 20여 년간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의 경우, 학생들이 1600여 개 기업을 세우거나 운영하면서 약 10만개 일자리를 창출했고요. 우리나라 이공계 중심 대학도 이 같은 사회·경제적 가치 창출에 진력할 때입니다."
/정무영 유니스트 총장 |
정무영(69) 유니스트 총장은 '수출형 연구'의 필요성을 짚었다. 그는 "이공학도들의 연구가 더는 실험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해 이를 수출하거나 사업화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이 자체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학교를 운영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미국의 경우 하버드대가 약 40조원, MIT가 약 15조원, 스탠퍼드대가 약 25조원 규모의 대학발전기금을 운용해요. 대학발전기금이 조금만 많아도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는 우리와는 다른 환경이죠. 대학이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실적용 논문'만 양산될 뿐, 미래에 대응할 교육이나 연구를 하기가 어려워요. 대학이 수출형 연구로 재정 자립을 현실화한다면 더 창의적인 연구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초·중·고 교육, 대입도 달라져야
이공계 대학 교육이 바뀌려면 초·중·고교 교육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재 초·중·고 교육과 평가(시험) 방식은 창의력 등을 키우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객관식 문제로 학습 내용을 평가한다면 교육과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다"며 "학생을 훨씬 섬세하고 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주관식 서술형 평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손'으로 경험하는 과학 교육이 확산해야 한다. 문 총장은 "지금처럼 주입식으로 이론을 배우다가 그중 한두 가지만 실험해 보는 식의 교육으론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며 "학생 스스로 생활에서 문제를 찾고 실험하며 해결책을 찾아내는 식의 체험 중심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초·중·고교에서 수학·물리·화학·생물 등 이공계 기초 교과목 실력과 글쓰기 등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는 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차 학장은 특히 최근 교육부가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수학 가형 출제 범위에서 '기하'를 제외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기하는 공간지각력과 창의력 계발에 꼭 필요한 기초학문으로 3D 프린팅이나 AI, 자율주행차, 로봇모션 인식 등 다양한 신기술에 응용되고 있어요. 물론 기계적으로 문제 푸는 방법만 익히는 현행 교육 시스템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기초를 전혀 배우지 않고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예요. 이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합니다."
☞조선에듀 홈페이지(edu.chosun.com)에서 '이공계 교육의 미래를 말하다' 연재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오선영 조선에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