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 선생과 한국헌혈운동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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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육군병원 병원장 조명제 대령이 수혈하고 있다. 국내에 수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 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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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현 JTBC) 방송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삼열 교수와 박진탁 목사가 헌혈자들과 좌담회 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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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매혈 시대
수혈이 우리나라 의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참담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상자 치료와 피난민 구호를 통해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한 단계 발전했다. 이때 부상자 치료에 쓰인 혈액은 모두 미국에서 공수됐다.
혈액 자급 시도는 1952년 해군혈액고(海軍血液庫) 창설, 54년 백병원 혈액은행 설립과 정부 산하 국립혈액원 개설로 이어졌다. 이 같은 움직임을 통해 우리나라 혈액사업이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혈액 공급은 거의 매혈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대한혈액관리협회가 창설돼 헌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전까지도 서울 시내 대학병원을 비롯한 전국의 각 혈액원에는 매혈자가 끊이지 않았다. 당국의 눈을 피해 불량 혈액을 거래하는 비밀혈액취급소도 있었다. 혈액의 암거래, 직업적이다시피 한 공혈자(供血者)의 반복 채혈로 인한 당사자의 건강 악화와 혈액의 질적 저하 등 매혈의 폐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53년 12월 11일 대한적십자사와 대책 회의를 갖고 이듬해인 54년 6월 국립혈액원을 창설했다. 정부 주도로 혈액원을 만들고, 정부가 관리를 시작해 공혈자의 기준을 제한했다지만 기준체중 미달자, 혈액의 비중검사에서 불합격된 자의 채혈을 금지하는 정도였다. 여전히 혈액 수급은 매혈에 의존했다. 헌혈 홍보와 계몽 운동을 펼치려도 예산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56년 2월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매혈을 하고 돌아가던 대학생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사건이 이어지자 정부는 혈액사업을 적십자에 이관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헌혈은 너무도 미미했기 때문에 적십자 역시 매혈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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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수도육군병원 수혈부 채혈실에서 채혈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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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 운동의 태동
헌혈 계몽 운동은 60년대 중반에 들어와 일부 대학에서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 헌혈 실적은 지지부진했다. 학생들은 이론과 필요성에는 많이 공감했으나 선뜻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부모나 주위 사람의 몰이해가 가장 큰 이유였다. 헌혈자의 집으로 헌혈증이나 감사장을 보내면 이를 본 부모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헌혈 사실을 비밀로 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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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헌혈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김기홍은 정부 혈액관리 자문위원회를 통해 혈액관리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한편 헌혈 확대와 혈액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정부 주도의 혈액관리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적십자사는 헌혈사업을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로 추진하고 헌혈협회도 헌혈 운동에 전력을 다하도록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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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70년 8월 혈액관리법을 제정해 헌혈 위주로 혈액 수요를 충당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행정적·법적으로 헌혈을 뒷받침했다. 법이 제정되기까지는 매혈 풍토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헌혈 운동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김기홍·이문호·안부호·이삼열·강득용·원종덕·이종무·김상인 등의 공이 컸다.
하지만 법령 제정 후에도 매혈은 없어지지 않았고, 의료기관은 혈액 부족에 시달렸다. 의료기관이 늘어나고 국민 의료 수요가 증가하는 데 비례해 혈액 소요량이 많아졌지만 경제 성장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 상대적으로 매혈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혈액관리협회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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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헌혈협회 이사장을 지낸 김기홍은 혈액관리위원회와 각 시도 헌혈추진협의회를 둬 헌혈 추진을 조직화하고 적십자혈액원은 헌혈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과 장비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헌혈 확충을 위해 정부가 앞장서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면 정부의 후원을 받는 혈액관리 주도 단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혈액원의 시설기준을 강화하고 종사자를 교육할 기구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하지만 매혈 위주의 혈액 수급, 혈액원의 낙후된 시설과 영세성, 전문 인력 부족, 국가적 지원의 결여, 혈액원 감독 기능의 미비 등 혈액 관리 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여러 요인은 근절되지 못했다. 혈액관리법 제정 후 혈액관리의 질서를 잡으려는 정부와 한국헌혈협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72년 미군 군용 혈액 도난, 74년 오염 혈액 공급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한편 대한적십자사는 국제적십자연맹이 세계 헌혈의 해로 선포한 74년 혈액사업을 완전히 헌혈로 전환해 매혈을 일절 중지하고 헌혈로만 혈액을 공급하겠다고 천명했다.
정부는 혈액 관리 사고가 이어지자 혈액관리법 개정에 착수하는 한편 대한혈액관리협회 설립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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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 17일 거행된 대한 혈액관리협회 현판식 장면. 왼쪽부터 이호 적십자사 총재, 김기홍 회장, 고재필 보사부 장관. 대한혈액관리 협회 발족을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전국적 규모로 헌혈 운동이 시작됐다. |
대한혈액관리협회는 75년 8월 14일 서울 소재 적십자혈액원의 사무실 일부를 빌려 업무를 시작했으며, 창설 1년 6개월 만인 76년 12월에 가서 법의 보장을 받는 단체가 되면서 정부 산하 혈액관리사업 총괄단체로 자리를 잡았다(『한국헌혈운동사』). 대한혈액관리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김기홍은 최우선 사업을 헌혈 풍토 조성으로 정하고 온 역량을 헌혈 계몽에 투입할 뜻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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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헌혈협회가 세브란스병원 에 지원한 헌혈차 앞에서 협회 인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대한혈액관리협회는 헌혈의 확충에 의한 혈액의 양적인 확보에서 더 나아가 환자에게 수혈되는 혈액의 안전성과 질적 향상, 지역 간의 혈액 공급 균형을 위한 사업에도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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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7월, 거리에서 헌혈 운동을 하는 세브 란스병원 헌혈팀과 격려차 들른 연세대 의대 이삼열 교수(대한혈액학회 회장?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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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헌혈로 90% 이상 충당
77년에는 개정 혈액관리법이 시행되고 같은 법 시행령이 개정됨에 따라 혈액원 설치가 의무화된 종합병원들이 혈액원을 속속 개설하면서 회원 혈액원의 수가 105개에서 123개로 늘며 협회의 역량도 커졌다. 이렇게 협회 역량이 강화되자 광고와 음악회 등을 통한 계몽사업, 의사 및 간호사에 대한 교육, 혈액 연구사업, 헌혈환부적립금을 이용한 혈액원 시설·장비의 현대화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처럼 대한혈액관리협회 발족을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헌혈 운동이 전개된 결과 76년에는 혈액 사용량의 절반을 헌혈로 충당할 수 있게 됐다. 77년에는 그 비중이 78%에 달하며 헌혈이 매혈을 압도하고 75년 협회 창립 이래 약 35만 병의 헌혈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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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헌혈 계몽 운동을 펼친 결과, 1979년에는 헌 혈로 전체 혈액 소요량의 90%를 충당하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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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헌혈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2016년에는 286만6330명이 헌혈을 했다. 헌혈자 실인원만 159만6294명에 달했다. 의료 현장에서도 혈액이 부족해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많은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헌혈문화가 꽃피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승수 객원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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