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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기고] 천연진주의 교훈과 특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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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구상의 모든 보석 중 유일하게 생명체가 직접 만드는 것이 진주다. 이러한 천연진주를 한 알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대략 1만여 개의 진주조개를 열어보아야 한다고 한다. 진주가 왜 보석의 여왕이며,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됐는지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진주목걸이 하나로 맨해튼의 6층짜리 저택을 살 수 있었던 1916년, 일본에서 한 특허가 등록됐다. 완전히 둥근 모양의 진주를 인공 양식으로 생산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발명은 끈질기게 시도돼온 진주 양식의 본격적인 상업화를 알리는 기폭제였다. 또한 수천 년 동안 각광받아오던 천연진주 산업의 퇴조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아라비아반도의 두바이와 아부다비도 그 물결을 피해가지 못했다. 천연진주의 산지이자 수출항이던 두 지역은 양식 진주 기술의 보급과 함께 몰락했고, 맨몸으로 진주조개를 캐던 잠수부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생계를 찾아 흩어졌다.

퇴락해가던 이 지역을 바꿔놓은 것은 석유였다.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유전은 아랍에미리트(UAE)의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경제 규모를 수백 배 성장시켰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근 4만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UAE의 상징은 목숨을 건 자맥질로 잡아 올리던 진주조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부르즈 칼리파'나 거대한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팜주메이라'가 됐다.

UAE의 상징은 변했지만 천연진주의 교훈은 잊히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말 개최됐던 문재인 대통령과 모하메드 알 나하얀 UAE 왕세제 간 정상회담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4차 산업혁명 분야 등 미래 성장을 위한 실질적인 협력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혁신성장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자신들의 미래를 진주나 석유 같은 천연자원이 아니라 혁신형 경제 구축에 걸고 있는 UAE의 열망이 합쳐진 결과였다.

양국 정상이 모두 참석한 MOU 체결식에서 'UAE 특허행정 자립화 지원을 위한 협력 양해각서'의 서명이 마무리된 것은 이러한 합의가 구체화된 성과였다. 탈석유 경제 구축에 필수적인 선진 지식재산 제도 도입에 UAE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한국에 협력을 요청했고, 여기에 우리 특허청이 화답하면서 맺어진 결실이었다.

사실 우리 특허청은 그동안 UAE의 지식재산 제도 발전을 위한 협력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 시작은 2014년 한국 특허심사관을 UAE에 파견해 특허심사를 대행해준 것이다. 한 국가의 특허권 부여에 관한 행정을 다른 나라 심사관 손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전례 없이 파격적인 특허 협력 형태였다. 그만큼 한국의 특허행정이 신뢰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심사 대행에 드는 비용은 전액 UAE 측이 부담하고 있으니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되는 셈이다.

또한 올 2월에는 우리의 노하우와 기술이 응집된 한국형 특허행정 IT 시스템이 현지에서 개통됐다. 행정서비스 수출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금액인 450만달러 규모의 유상 협력사업이었다. 이 시스템 개통으로 수작업에 의존하던 UAE의 특허행정 프로세스는 이제 모바일 업무 처리까지 가능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은 혁신 촉진형 지식재산 제도 구축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과 UAE의 협력 성과가 알려진 이후 우리의 이러한 선진 특허행정을 배우려는 나라들의 요청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행정한류 확산의 새로운 모델이 특허 분야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UAE 등 주요 국가와 지식재산 국제 협력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지식재산 제도'가 '혁신'의 불가결한 요소임을 항상 말해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혁신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식재산의 역할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뤄왔고, 또 앞으로 달성해나갈 성취는 결국 '혁신'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천연진주의 달콤한 추억조차 없었던 우리에게는 더욱 말이다.

[성윤모 특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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