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6 (토)

[흔들리는 민영화 기업 하(下)] '옛 공기업의 저주'...포스코·KT 잔혹사 현재진행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더팩트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18일 전격 사임하면서 그 배경에 이목이 쏠린다. 재계에서는 정권 차원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더팩트 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 중도 사퇴…황창규 KT 회장 운명은

[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정부 지분이 없는 민영화 기업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수가 교체되는 악순환 언제까지...'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지난 18일 돌연 사임을 선언했다. 표면적 이유는 '건강을 위한 휴식'이지만 그 이면에는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어떤 심리적 압박일까. 포스코의 과거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인 없는 기업'으로 불리는 포스코 회장들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외부 입김으로 쫓겨나듯 물러났다.

이동통신사 KT 입장에서도 이번 권 회장 사임이 남 일 같지 않다. KT 역시 포스코와 마찬가지로 과거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됐지만 정치권 등 외풍(外風)에 여전히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실제로 현재 KT 수장인 황창규 회장도 퇴진 요구에 직면한 상황이다. 포스코와 KT를 둘러싼 수난의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민영화 기업에 대한 지나친 정치 외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 역대 회장 8명 모두 ‘중도하차’...현실화된 '포스코 잔혹사'

권 회장은 이날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에서 임시 이사회를 열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권 회장은 이사회에서 "포스코의 새로운 100년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변화가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열정적이고 능력 있으며 젊고 박력 있는 분에게 회사 경영을 넘기는 게 좋겠다"고 설명했다.

권 회장의 사임 이유는 '건강 악화'다. 하지만 임기를 2년이나 남긴 권 회장이 조기 사임을 한 것에 대해 재계가 바라보는 시선은 따로 있다. 바로 정부의 압박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된 권 회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퇴설(說)이 꾸준히 거론됐다.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아 권 회장 임기가 끝나기 전에 물러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특히 권 회장은 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인도네시아·베트남·중국 등 4차례에 걸친 문 대통령 해외 순방 수행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포스코는 2000년 정부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민영화됐다. 하지만 권 회장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수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일이 반복됐다. 역대 회장 8명이 모두 '중도하차'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포스코의 잔혹사'라고 부른다. 사임 이유는 다양했지만 같은 사례가 반복되면서 결국 정부 입김에 의해 회장들 운명이 좌지우지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권 회장 전임인 정준양 전(前) 회장은 2009년 1월 취임해 2012년 연임에 성공했지만 2014년 3월 임기를 1년 4개월여 남겨놓고 사임했다. 양상은 권 회장과 비슷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취임한 정 전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후 번번이 주요 해외 순방 수행단에 배제됐다. 또 서울 포스코센터, 광양제철소, 포항 본사 등 동시다발적인 세무조사가 들어오자 사임 의사를 밝혔다. 이후 정 전 회장은 포스코 민원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됐지만 지난해 11월 무죄가 선고됐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부 당시 취임한 이구택 전 회장도 2007년 1월 연임에 성공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 논란에 휩싸였다. 2008년 말부터는 포스코가 세무조사 무마를 조건으로 당시 이주성 국세청장에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그는 2009년 1월 정치권 외압 논란이 진행되는 와중에 조기 사임했다.

포스코는 민영화 이전에도 수차례 회장이 조기 사임하는 문제를 겪었다. 고 박태준 초대회장(1968년 4월~1992년 10월)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했다. 이어 황경로(1992년 10월~1993년 3월)·정명식(1993년 3월~1994년 3월)·김만제(1994년 3월~1998년 3월)·유상부(1998년 3월~2003년 3월) 전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포스코 잔혹사'라는 말이 나오는 데는 이러한 회장들의 중도 하차 배경이 깔려 있다. 권 회장의 이날 사임 선언을 놓고 정부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 섞인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팩트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마찬가지로 지난 정부 시절 선임된 황창규 KT 회장(오른쪽 두번째)이 최근 후원금 지원과 관련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임세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CEO 잔혹사' KT도 반복할까

권 회장은 지난달 포스코 창립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직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지만 돌연 사의를 밝혔다. 포스코 안팎에서는 포스코건설 등 포스코 계열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정권이 퇴진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권 회장이 조직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물러나기로 입장을 정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황창규 KT 회장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소환되는 모습을 보면서 심리적 압박이 커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황창규 KT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경찰청에 출석해 18일 오전 5시까지 20여시간 고강도 조사를 받았다. 그에게 쓰인 혐의는 KT 전·현직 임원들이 국회의원에게 KT 법인자금으로 4억3000여만 원을 후원한 것과 관련해 지시를 내렸거나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혐의 대부분을 부인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2014년 3월 KT 회장에 취임한 황 회장은 지난해 3월 연임에 성공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경영 성과 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끊임없이 '중도 퇴진설'이 제기됐다. 이는 권 회장의 사임 직전 상황과 판박이다. 황 회장이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권 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KT는 포스코와 마찬가지로 많은 'CEO 잔혹사'를 남긴 대표적인 기업이다. 황 회장에 대한 경찰 수사에 냉소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과거 사례 탓이다. 2002년 민영화 이후 KT를 이끈 이용경 사장이 2005년 8월 임기 만료 후 단임으로 물러난 것을 제외하면 연임에 성공했던 후임자들이 모두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불명예 퇴진했다.

2005년 8월 임시주총을 통해 사장으로 선임된 남중수 전 사장은 2008년 정기주총에서 재선임되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납품업체 선정 및 인사 청탁 등 비리 혐의로 압수수색 등이 시작되자 사임했다. 민영화 3기 이석채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MB 정부 인사로 여겨졌던 이 회장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2012년 3월 주총에서 연임에 성공했지만 이후 여러 잡음에 시달렸다. 결국 배임 혐의와 회삿돈으로 11억 원대 비자금을 만든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이 전 회장은 임기를 2년 남기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문에 권 회장의 사의 표명과 황 회장에 대한 경찰 수사를 놓고 표면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구심 섞인 의견이 흘러나온다. 재계에서는 포스코와 KT를 둘러싼 잔혹사가 반복될 기미가 보이자 민영화 기업에 대한 지나친 정치 외풍이 기업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뀐 이후 KT와 포스코에 정권 입김이 작용한다는 건 기정사실화된 공식"이라며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압박이 가해 기업 수장들이 임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행태는 기업 발전을 위해 사라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라도 포스코와 KT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rocky@tf.co.kr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