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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허진석의 책과 저자]로베르토 볼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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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위계에의 도전

아시아경제

로베르토 볼라뇨 [사진=글누림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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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아르헨티나 시인 에스테반 무어를 인터뷰할 때 물었다.
"누가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혹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에스테반은 대답했다.
"그는 위대한 시인으로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언어야말로 시의 진정한 고향임을 항상 내게 상기시켰고, 잊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번역을 통해 접한 영국과 미국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둔다."
이보다 앞선 5월에는 칠레 시인 세르히오 바디야 카스티요를 인터뷰했다. 내가 "파블로 네루다의 영향은 어느 정도나 받았는가"하고 묻자 세르히오는 한숨을 푹 쉬는 듯한 어투로 대답했다.
"거의 없다. 보편적 역사의 특정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거대한 스케일 같은 기본적 요소가 비슷할지는 모르겠다. 파블로 네루다가 쓴 '지상의 거주지(1933)'는 나보다 훨씬 앞 세대의 작품이다."

에스테반이나 세르히오가 나에게 "두 유 노 싸이?"나 "두 유 노 박지성?" 같은 질문을 하면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다.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튼 두 사람은 시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바르가스 요사에 대해 묻지 않았다. 2015년 5월에 인터뷰한 독일 시인 미하엘 오거스틴은 자신의 고향인 뤼베크에 대해 설명하면서 토마스 만과 귄터 그라스를 자랑스러워했다.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를 인터뷰했다면 로베로토 볼라뇨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까. 섬광처럼 한 시대를 가로지르고 떠나 버렸기에 기억보다는 잔상처럼 남은 사나이,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표지 속에 생살처럼 선연한 문장을 매설한 그의 소설에 대하여.

볼라뇨는 '야만스러운 탐정들(1998)'로 1999년 로물로 가예고스 문학상을 받아 문단에 이름을 알린다. 단숨에 비평계의 눈길을 사로잡고 대중의 관심을 모았지만 그의 수명은 명성을 누릴 새도 없을 만큼 짧았다. 그는 '칠레의 밤' 영문판이 나온 2003년에 죽었다.

그해 6월27일 볼라뇨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작가 대회에 참가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새로운 대변자이자 토템'이라는 찬사를 누린다. 작은 해변 도시 블라네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 볼라뇨는 각혈을 하며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의 원고를 출력해 아나그라마 출판사에 넘겼다. 그리고 7월1일 간부전 악화로 입원해 열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7월1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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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누림에서 출간한 '로베르토 볼라뇨'는 국내외 라틴아메리카 문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문학과 세계에 대한 볼라뇨의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논의의 장을 확대하기 위해' 준비한 책이다. 저자들은 우리 문학과 문단, 사회의 초상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뜻도 숨기지 않았다.

엮은이 이경민은 "'참을 수 없는 가우초' '남부'에 나타난 문명과 야만에 대한 재해석"에서 볼라뇨 작품 세계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기성 작품에 대한 변형적 다시쓰기를 창작 기법으로 활용한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적 글쓰기 전략은 필연적으로 기성 작품에 대한 문학적 유희와 경의를 넘나들며 기존의 고착화된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해 기성 작품의 권위와 위계를 무너뜨리고 문학작품을 현재적 수평 관계로 재정립한다."(317~318쪽)

권위와 위계에 대한 도전은 볼라뇨의 내면에 선명한 문신과도 같다. 그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문단을 정글에 빗대면서 작가들이 회사원이나 갱스터처럼 계급 피라미드에서 상승하기 위한 글쓰기를, 즉 아무것도 위반하지 않으려고 엄청 조심하면서 자리를 굳히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이경민)

사실 이 책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프로필을 이해하는 데 쉬운 길잡이는 아니다. 연구자들이 써낸 높은 수준의 논문을 모아 책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볼라뇨의 작품을 많이 읽고 충분히 이해한 독자라면 모를까, 한 마디로 어렵고 때로는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이경민은 '참을 수 없는 가우초'에 대해 쓰면서 볼라뇨의 상호텍스트적 글쓰기 전략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이 책은 단행본이 아니라 논문 모음이므로 피할 수 없는 중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볼라뇨에 대한 나의 이해는 2010년 출판사 열린책들이 호르헤 볼피의 책을 번역해 출간한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 빚지고 있다. 박세형이 번역한 이 책은 볼라뇨에 대한 평론 선집이다. 볼라뇨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길잡이로서 볼라뇨에 대한 절절한 애정과 그리움이 충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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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볼라뇨 [사진=글누림 출판사 제공]


"바로크적인 동시에 간결하고, 현학자인 척하지 않고도 박식하며, 비극적 형이상학자이자 진지한 농담꾼이며, 시에 미쳤지만 흠잡을 데 없이 효율적인 소설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 … 우디 앨런과 로트레아몽, 타란티노와 보르헤스를 섞어 놓은 듯한 비범한 작가. (중략) 볼라뇨는 과도한 감정의 분출과 거창한 연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작품을 읽으며 그와 더불어 웃는 것만이 경의를 표하는 유일한 길이리라."(14쪽)

한번도 볼라뇨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면 '칠레의 밤(Nocturno de Chile)'을 권하겠다. 충격적인 표지가 독자에게 쉽지 않은 독서 체험을 예고하는 듯하다. 두 팔을 벌리고 누운 사람의 가슴을 누군가 예리한 칼로 그어 벌려놓았다. 사제복인 듯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카누 모양의 상처 속에 들어앉아 양손으로 노를 젓는다.

볼라뇨는 칠레의 보수적 사제이자 문학 비평가인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의 독백 형식으로 소설을 써내려갔다. 임종을 앞둔 세바스티안이 어느 '늙다리 청년'의 환영에 시달려가며 피노체트가 통치하는 칠레에서 보낸 일생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이 책의 9~10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독백을 넘어선 다짐이 볼라뇨의 침대 시트를 적신 각혈처럼 선연하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문화부 부국장 huhball@

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엮음
글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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