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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부동산 이중매매 ‘배임죄’ 처벌까지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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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심모(63)씨는 방모씨에게 자신의 땅을 9700만원에 팔기로 계약하고, 계약금 2000만원을 받았다. 심씨는 당초 논이었던 땅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바꿔서 한 달 내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용도변경이 미뤄지며 땅 소유권은 해를 넘기고도 방씨에게 넘어가지 않았고, 그 사이 심씨는 중도금 1000만원을 추가로 받았다.

심씨는 방씨와 계약한 이후인 2013년 초 갑자기 돈이 필요해 이 땅을 담보로 잡히고 8000만원을 빌려 썼다. 잔금을 치르면 방씨 소유가 될 땅에 근저당권을 설정해버린 것이다. 방씨는 곧바로 심씨를 고소했고, 수사에 나선 검찰은 심씨가 방씨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배임 혐의로 심씨를 재판에 넘겼다.

팔려던 땅을 담보로 잡히거나 제3자에게 팔아버렸을 때, 즉 부동산 이중매매를 배임 혐의로 형사처벌까지 해야할까.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은 22일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땅 주인 심씨의 상고심 사건에 대해 공개변론을 열었다. 전원합의체는 기존 판례를 바꿀지를 검토해야 하는 등 사안이 복잡한 사건이나 대법원장이 직접 재판장을 맡고 대법관 전원이 심리에 참여하는 재판을 말한다.

조선일보

대법원/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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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 “이중매매, 등기협력의무 어겨 배임”
판례는 땅을 사기로 한 사람의 재산보호를 위해 원래 주인이 거래 상대방에게 소유권 등기를 무사히 넘겨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등기협력의무)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중매매를 하면 형사처벌 대상으로 판단해 왔다. 심씨 사건의 경우 1·2심 역시 심씨의 유죄를 인정,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다만 동산(動産) 거래의 경우 원래 주인이 최종적으로 누구와 거래하든 앞서 계약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만으로 배임죄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부동산 거래라도 소유권을 넘겨줘야 할 의무가 생겼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도 했다. 201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출 담보로 잡힌 땅을 채권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경우 배임죄로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빚만 제대로 갚으면 굳이 땅을 넘겨줄 의무는 없다고 본 것이다.

결국 땅을 온전히 넘겨줄 의무가 생겼는지 여부는 원래 주인이 중도금을 받았는지가 기준이 돼 왔다. 계약금만 받은 경우 누군가 계약을 물리면 그만이지만, 일단 중도금이 지급된 이상 약속한 기간 내 잔금이 치러지지 않는 경우 등이 아니면 함부로 계약을 깰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거래에 국가형벌권 간섭은 부당”
이중매매를 배임으로 처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법조계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우선 매도인이 배임죄의 주체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 손해를 끼쳤을 때 처벌하는 범죄다. 땅 주인이 잔금을 받고 매수인에게 등기를 해주는 것은 자신의 사무, 최소한 타인을 위한 사무일수는 있어도 ‘타인의 사무’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 사적인 거래에 국가형벌권이 간섭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는 지적이다.

중도금 지급을 기준으로 등기협력의무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또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중도금’을 주고 부동산을 사고파는 거래 관행은 법률적 근거도 없고,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외국에서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배임죄 처벌로 거래를 강제하지 않고 유리한 조건·가격에 따라 얼마든 거래 상대방을 바꿀 수 있도록 해주면 오히려 ‘계약금-잔금’으로 거래구조를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씨 측 변호인단도 이날 공개변론에서 “매도인의 등기협력의무가 타인을 위한 사무일 수는 있어도 배임죄 요건인 타인의 사무로 볼 수 없고, 매수인은 손해배상 강제 등을 통해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다수 거래가 중도금 관행에 따르고 있어 기존 판례가 바뀔 경우 매수인 보호가 약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검찰 역시 공개변론에서 “이중매매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아 온 기존 판례가 바뀌게 되면 거래 관행에 혼란을 미치고 매수인 보호가 약화될 것이 우려된다”며 “거래구조가 합리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관념적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전문가 견해 분분, 대법원 “2~3개월 내 선고 예정”
전문가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대법원은 공개변론을 앞두고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대한법무사협회, 대한변호사협회, 전국은행연합회, 한국민사법학회, 한국법경제학회 등 6개 단체로부터 의견을 받았다.

변호사협회는 “이중매매를 배임죄로 처벌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매끄럽지는 않지만, 매수인 보호를 위한 거래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판례 변경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법무사협회, 공인중개사협회 역시 가등기 활성화, 민사상 손해배상청구 등으로 이중매매 피해를 막는 것이 타당하지만,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의견을 냈다. 은행연합회도 민사절차로 매수인 보호에 나설 경우 대출심사 강화 등 거래비용 증가가 뒤따를 수 있다며 판례 변경 반대에 가까운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한국민사법학회, 한국법경제학회 관계자 등은 이중매매를 배임죄로 형사처벌까지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위약금 강화 등으로도 매수인을 보호할 수 있고, 부동산 거래관행도 계약금과 잔금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에스크로(거래대금 보관)나 손해보험제도 이용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대법원은 공개변론에서 오간 내용까지 참고한 뒤 최종 토론을 거쳐 2~3개월 내 이 사건의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한편 이날 공개변론은 유튜브, 페이스북 라이브, 네이버 TV 등을 통해 생중계 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민들의 사법에 대한 신뢰,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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