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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미투]성희롱 피해자 진정 취하 종용…보복 인사엔 눈감은 노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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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감독관들 낮은 성인지 감수성에 해결 의지도 부족

부당 인사 사업주 기소율 7% …노동자에 또 다른 상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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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규모 웹디자인 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ㄱ씨는 2016년 회식 자리에서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ㄱ씨는 노동청에 진정을 넣어 조사를 받으러 갔다. 여성 근로감독관 앞에서 증언했는데, 조사 장소가 개방된 사무실이어서 옆자리 남성 감독관이 피해 사실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ㄱ씨는 “제3자가 개인적인 얘기까지 듣는 상황이 무척 불편했고 말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몇 달 후 사장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ㄱ씨는 과태료가 얼마나 나왔는지 물었으나, 노동청에서 돌아온 대답은 “본인 줄 돈도 아닌데 왜 묻느냐”였다. ㄱ씨는 “성희롱을 당해 이미 상처를 받았는데 어렵게 찾은 노동청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으로 이뤄진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가 13일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한 일화 중 일부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맡아온 민간 상담사들은 ㄱ씨 사례가 “노동청 문을 두드린 적지 않은 숫자의 피해자들이 겪어온 경험”이라며 “근로감독관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의지 부족, 조사 과정에서의 추가 피해 등을 자주 확인하곤 한다”고 말했다.

근로감독관이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진정을 취하할 것을 종용하는 경우도 잦았다. 지난해 한 용역업체 소속 청소미화원은 밤에 청소일을 하던 중 남성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회사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자 ㄴ씨는 노동청을 찾았다. 진정 접수 뒤 2주가 지났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 직접 찾아가니 근로감독관은 “회사에서 (가해 직원이) 대기발령 중이라고 하더라”며 “이 문제는 현장소장이랑 해결해야지, 우리는 못한다”고 말했다. 아예 “어차피 진정 취하하실 것 같은데 오신 김에 취하서나 쓰고 가시라”고까지 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사건 2734건 가운데 노동청의 지시로 가해자 징계와 당사자 분리 등 시정조치가 이뤄진 건수는 307건에 불과했다. 사건이 사업주 기소까지 이어진 것은 0.5%에 그쳤다. 피해자가 따돌림·괴롭힘 등 2차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사업주가 피해자에게 해고·전보 등 부당한 인사조치를 하는 것은 3년 이하 징역까지 받을 수 있는 행위이지만, 기소로까지 넘어간 사건은 전체의 7.7%에 불과했다. 일반 형사사건의 기소율(47.3%)과 비교해 턱없이 낮다.

기자회견에서 상담사들은 “근로감독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부회장은 “개별 근로감독관들의 젠더 감수성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구조’에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인력이 임금체불 업무에만 매몰돼 있어 직장 내 성희롱은 수많은 사건 중 하나 정도로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별도 조사실이 일선 지청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난 8일 노동부·여성가족부 등 관계부처는 ‘직장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성희롱 사건을 전담하는 근로감독관을 각 지청에 배치하고 익명 신고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황 부회장은 “단 47명의 근로감독관이 약 400만개 업체의 성희롱 사건을 포함한 성차별, 모성권 등 남녀고용평등 업무를 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성평등 관점을 가진 근로감독관이 대거 확충되지 않으면 노동부의 시정 기능은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인력 부족 때문에 직장 내 성희롱 사건 등 남녀고용평등 업무에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민간 상담실과도 소통하면서 현장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볼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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