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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설문응답 영화인 76%, 영화계 성폭력 해결 비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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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식

영화계 성폭력·성희롱 실태 조사 결과 발표

중앙일보

12일 임순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센터장(오른쪽)과 심재명 센터장이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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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조감독이 여자 스태프를 좋아했는데 안 받아주니까 스토킹 비슷하게 하다 나중에는 일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 다 보는 앞에서.”(촬영 담당 스태프)
“문제 제기를 하면 이 판에 더는 발을 들이기 어려워요. 제작자 대부분 남자니까 ‘쟤 되게 까다롭다’ ‘성격 안 좋다’ 소문내기 시작하면 전혀 일이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영화계 성폭력?성희롱 피해자 상담원)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현장의 인식은 비관적이었다. 12일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오석근)와 여성영화인모임(대표 채윤희),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공동 주최로 열린 한국 영화 성평등 센터 ‘든든’ 개소식에선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력?성희롱의 구체적 실태가 발표됐다. 영화계가 관련 실태를 공식 조사한 건 2016년 영화계 안팎 성폭력 고발이 시작된 뒤 처음이다.

지난해 7월부터 2개월여 남녀 현장 영화인 751명을 설문 조사한 중앙대학교 이나영 사회학과 교수는 “본인이 피해본 적 있다는 영화인이 응답자의 46.1%로, 전국 단위 조사 수치보다 높았다”고 지적했다. 피해 사례는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음담패설(28.2%)이 가장 많고, 원치 않는 신체접촉(15.8%)이나 성관계 요구(7.9%)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영화계에 관련 사건이 발생해도 해결이 어렵다는 답변은 76%에 달했다. 이 교수는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인맥이나 소문이 중요한 조직문화나 권위적 분위기 등으로 공론화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남성보단 여성이, 비정규직이거나, 연령이 낮을수록 적절히 사과받지 못하거나 행위자에 대한 징계조치가 없었다는 답변 비율이 높았다”고 밝혔다. 가해자 성별은 남성이 71.6%로 나타났다. 또 가해자가 상급자인 위계형 피해(48.7%)가 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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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 참석자들. 왼쪽부터 남순아 영화감독,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이나영 중앙대학교 교수, 심재명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대표, 영화배우 문소리, 원미경 법무법인 원 변호사,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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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직?간접 피해를 경험한 영화인 및 사건지원 변호사, 상담원 등 10명과 영화산업 내 직군별 5개 집단(독립 및 상업영화감독?촬영?분장?작가) 19명이 참여한 별도 면접 조사도 진행했다. 여기선 “군대식 문화가 쌓여오다 보니, 개개인의 요구조건을 얘기하기 쉽지 않다”(촬영감독A)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교수는 “불안정한 고용과 연결된 영화계 구조로 인해 부당한 관행 및 성폭력?성희롱을 문제 삼기 어려워, 여성 스태프들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고정된 성역할에 순응하거나 떠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여성 동료를 성적 대상으로 인식해 연애라는 이름으로 성폭력?성희롱을 저지르고, 피해자가 오히려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기도 하는 실태도 드러났다. “영화감독이 없던 장면을 만들어서 더 섹시하게 찍고 싶지 않냐고… 스태프들은 다 배우만 쳐다보고 있는 거죠. 피곤한데 그냥 찍고 넘어가자, 이런 표정으로.” 면접에 응한 10년차 여배우의 말이다. 최근 영화?공연계 미투에서 드러났듯 배우는 출연을 빌미로 사적 만남을 요구받거나, 합의되지 않은 노출신을 요구받는 등 피해에 특히 취약했다.

성불평등에 대한 영화인의 인식 차이도 드러났다. 여성이 남성보다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어렵다는 항목에 여성 응답자 중 64.2%가 그렇다고 답한 데 반해, 남성은 37.5%에 그쳤다. 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는 “여자 원톱 시나리오를 쓰면 투자가 안 된다며 남자로 바꾸라는 요구를 많이 받는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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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사업 운영 MOU를 체결한 채윤희 여성영화인모임 대표(오른쪽)와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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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서는 성평등센터 '든든'이 새로운 돌파구가 되리라는 기대가 나온다. 여성영화인모임과 영진위는 '든든'을 통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및 콘텐트 개발과 캠페인, 상담 및 조사, 피해자 지원 등을 원스톱으로 시행한다는 것이 목표다. 영화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와 함께 공동 센터장에 임명된 임순례 감독은 “놀랄 만큼 심각한 성폭력 피해로 영화계 떠나간 동료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피해 근절과 방지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온 배우 문소리는 “배우로서 동료 영화인들과 관련 기금 마련 등에 동참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며 한국판 ‘타임스업’의 의지를 조심스레 내비쳤다. '든든'의 법률자문위원인 원민경 변호사(법무법인 원)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을 호소한 피해자들이 어렵게 목소리를 내 수사가 진행돼도 현재까진 실형선고는 거의 드물고 대다수 벌금형으로 끝나 피해자가 절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미투’가 피해자들만의 ‘미투’로 끝나지 않으려면 사법부가 응답해야 한다”고 법적 대책을 요구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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