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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세상 읽기] 쌍용차 김득중씨의 어느 하루 /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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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그날은 유별난 날이었다.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되었고 겨울 패럴림픽이 개막했다. 미투로 소환된 유력 정치인이 검찰 포토라인 앞에서 입장을 밝혔으며, 성추행 구설에 오른 연예인은 자살했다. 언론 공정성 시비에 올랐던 이들이 야당에 입당하며 공정한 언론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밝혔다. 연예인 누구의 열애설과 결별설이 터졌으며 무엇보다 탄핵 1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날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김득중 지부장은 단식 9일째였다. 실무협상에 들어간 윤충열 노조 수석부지부장에게 들려온 내용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대화 더 해보라는 말, 하지 않았습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130명입니다. 회사는 복직 시기를 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회사는 단식을 하는 것, 영업소 앞 1인 시위 하는 것 모두를 부담스러워했다. 단식은 시작했지만 영업소 앞 1인 시위는 대화하는 동안 접었다. 그러나 실무협상 세 차례 동안 회사의 답은 마찬가지였다. ‘시장 상황이 유동적이고 차량 판매를 예측할 수 없다.’ 복직 인원과 기한에 대한 약속은 안 하겠다는 소리다.

지난 2015년 회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정리해고 및 징계해고 노동자 179명을 복직시키는 데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해결되는구나…. 2016년 18명, 2017년 19명이 복직했다. 몇년 동안 그야말로 찔끔찔끔 몇명 복직된 것 외에 변화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잊어갔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모두 복직했겠거니…. 2015년 약속의 시작은 ‘티볼리’ 판매 호조가 배경이었다. 티볼리가 잘 팔린 배경에는 해고자들이 굴뚝 위에 올라가 ‘회사를 살리자’ 목소리를 높이고 연예인들까지 나서 해고자 복직시키면 티볼리를 사겠다고 했던 연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연대의 발걸음만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김득중 지부장. 2009년 공장 밖으로 내몰려 햇수로 10년을 복직투쟁으로 보냈다. “2015년 합의 이후가 더 피 말리는 시간이었어요. 누가 먼저 들어갈 것인지부터, 이게 맞는 길인지까지…. 얼마나 많은 논의가 있었겠습니까. 그걸 책임져야 하는 지부장이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맨 마지막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어요.”

파업 당시 조직쟁의실장이었다. 그때 노동자들이 다 같이 단결해서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했던 말을 지키려 여기까지 왔다. 단식에 들어가며 ‘지난 10년간 좌절하는 130명 동료들을 다독이며 시간을 물어뜯는 심정으로 버텼다.’ 네번째 단식이다. 지난 단식은 40일을 넘겼다. 건강을 해쳐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단 1시간이라도 빨리, 공포로 물들어가는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중단시키고 싶다’는 결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최근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생기고 나서 자신이 당한 2009년 일을 말하기 시작한 조합원들이 있어요. 복직도 그렇고, 지난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상처도 그렇고, 조합원들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싸울 수밖에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세상을 들었다 놓는 수많은 사건 속에서 그의 단식과 그들의 복직은 별다른 사건이 아니다. 2009년부터 반복된 야만의 시간이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오늘도 김득중의 시계는 흘러가고 있다. 단식 12일…. 또 하루 또 하루…. 유별난 일 없이 뼈와 살을 태우는 날들이, 단지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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