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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수)

[매경포럼] 통상협상, 그 은밀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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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의 통상 역사에서 압권은 누가 뭐래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었다. 그 이전에도 자동차, 철강 등에서 미국과 큰 승부가 더러 있었지만 품목별 협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한미 FTA 협상은 상품 전 품목은 물론 금융, 법률 등 서비스 모든 영역까지 아우르는 초대형 협상이었다.

국민적 관심도 대단했다. 한미 FTA라는 단어만 나오면 대미 종속을 떠올리며 흥분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든 보수든 할 것 없이 한미 FTA 폐기를 거론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똑같이 '미치광이'로 폄하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한미 FTA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사람도 많다. 당시 우리 측 협상 대표를 맡았던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이후 국회의원을 지냈고, 미국 측 대표였던 웬디 커틀러는 높은 인지도 덕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자주 초청받는다. 지금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도 스타로 부상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오랜 시간 야인으로 보냈지만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는 장관급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차관급을 맡고 있으니 이 또한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지만 타고난 애국주의자인 김 본부장에겐 감투가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 본부장은 역대 최강의 통상 압박에 맞서 3주 연속으로 미국을 찾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힘에 부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가 야인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 조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나마 자유무역주의자로 친분이 강했던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 갑자기 물러났으니 김 본부장이 느끼는 좌절감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와중에 캐나다와 멕시코에 이어 호주까지 철강 관세 부과 예외를 인정받았다.

우리는 흔히 통상 협상 때 통계와 숫자로 싸운다고 생각한다. 숫자가 테이블에 기본 자료로 놓이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협상을 타결 짓는 힘은 숫자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치와 외교, 명분이 너무도 쉽게 숫자를 압도한다.

한미 FTA 협상 때도 그랬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던 미국 측 인사는 주로 커틀러였다. 커틀러는 숫자로 우리를 압박했다. 협상이 잘 진행되다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다시 봉합되는 것은 커틀러와 김종훈 간 숫자 싸움처럼 보였다.

그러나 협상의 고비마다 해결사 역할을 한 미국 측 인사는 사실 따로 있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커트 통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경제담당관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FTA 협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전면에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커틀러에게 은밀한 시그널을 주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의 뒤에는 백악관이 버티고 있었고, 정무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한미 FTA 최종 타결 순간에도 그는 커틀러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한미 FTA 20여 개 분과 중에서도 협상을 가장 잘했다는 평가를 받은 분과가 있었다. 그 분과의 우리 측 대표는 미국 분과장이 승진에서 번번이 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그에게 "커틀러가 협상장에 들어오면 무조건 나를 강하게 몰아붙여라"고 주문했다. 커틀러는 매번 한국을 다그치는 그 분과장을 기특하게 여겼다. 협상 타결 후 미국 분과장은 보란 듯이 승진했다. 이 분과의 협상 결과가 한미 양측이 서로 윈윈한 대표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은밀한 소통의 결과였다.

통상 협상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쇼잉'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은 은밀하게 이뤄진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통상과 안보를 분리해 대응하자고 공언해서는 국내용 선전은 되겠지만 통상 전투를 효율적으로 끌고 가기 어렵다. 차라리 다 잊고 트럼프와 친구가 되는 것이 국익에는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워싱턴에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통상 지한파(知韓派)'라도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그것도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말이다.

[정혁훈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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