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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한 애국지사 手筆로 50년 전 이 애국가가 창작됐지만, 佚名해버렸다” (-1945년 김구 주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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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 미상’의 진실…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윤치호 확정 발표 對 유보… 조사위원 투표 결과 11:2

정부는 ‘윤치호 미확정’ 발표, 그뒤 ‘작사 미상’으로 남아

”윤치호씨는 親日한 사람, 작사자 돼서는 안 된다는 뜻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

‘애국가와 관련해 할 얘기가 있다’는 김연갑(64)씨의 메일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심각한 역사(歷史)의 고민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애국가는 ‘작곡 안익태, 작사 미상(未詳)’으로 되어 있습니다. 친일파 이력이 있는 인물이라 ‘윤치호’ 이름을 지워왔던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태극기를 만든 박영효나 ‘기미독립선언서’의 최남선도 지워야 합니까. 우리 근대사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는 “후대 사람들은 피상적인 잣대로만 ‘친일’을 본다”고 말했다.


―지금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내년 '임정(臨政)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국호·태극기·애국가 등 국가 상징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국가' 문제도 공개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계속 덮어두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차라리 '윤치호는 친일파이니 애국가를 바꿔야 하는가'라고 묻는 게 정직합니다."

그는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다. 지금까지 7400여 수의 아리랑을 수집했고 저서도 열 권 남짓 냈다.

"애국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년 전쯤입니다. 몇몇 학자들이 이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에서 부인됐던 '안창호 작사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민족지도자(안창호)가 지었으면 좋겠지만,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애국가 작사자를 둘러싼 첫 논쟁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국무부가 백과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애국가의 연혁(沿革)을 알려달라고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문교부에서 '작곡 안익태·작사 안창호로 통보할 것'이라고 알려지자, 여러 신문에서 반론이 쏟아졌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에서는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는 것은 우리 문화의 수치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수치'라고 하는 등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작사자로 거론된 인물들에 대한 증거 자료와 증언 등을 수집했습니다. 1차 위원회에서 '안창호 작사는 아닌 게 명백하다'고 결론 났습니다. 2차 위원회부터 '윤치호'로 좁혀 갔습니다. 석 달간 조사를 마무리 짓는 3차 위원회에서 '윤치호 확정 발표' 문제를 놓고 최종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조사위원 투표에서 '윤치호 확정 발표' 대(對) '유보'가 11:2로 나왔습니다. 문교부는 이를 '윤치호 작사 미확정으로 결론 났다'고 발표했습니다. '애국가 가사를 친일파가 썼다'는 부담이 작용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추측합니까?

"당시 한 신문은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라고 질타했습니다. 그 발표로 인해 60년 이상 흐른 지금까지 애국가는 작사 미상으로 남게 된 겁니다."

―그 공식 조사가 있은 뒤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게 있습니까?

"1908년 윤치호가 발행한 가사집 '찬미가(讚美歌)'에는 외국 번역 노래 12편과 국내 노래 3편이 들어 있습니다. 국내 노래 중 한 편은 후렴이 애국가와 같고, 다른 한 편은 애국가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하지만 가사집에는 '윤치호 역술(譯述)'로 돼 있어 그가 직접 지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역술'이라면 윤치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군요.

"당시 역술의 용례를 보면 번역과 일부 창작을 의미합니다. 윤치호가 지었다는 증거를 다른 자료에서 제가 찾아냈습니다."

―그 증거란?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이 쓴 '편집자 노트'에서 찾아냈습니다. '1897년 8월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을 맞아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 노래 가사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이화학당 설립자)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불렀다'고 나옵니다. 그 무궁화 노래 1절이 소개돼 있는데, 바로 '찬미가' 가사집의 10장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무궁화 노래는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로 시작되고 후렴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되어 있다.

―이 가사는 '애국가'와 다르지 않습니까?

"후렴과 곡조가 동일합니다. 가사집의 애국가도 윤치호가 지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이지요. 1910년 신한민보에 '국민가' 이름으로 애국가 가사가 실려 있고, '윤티(치)호' 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일보

윤치호(尹致昊·1865~1945)와 애국가 작사자를 입증하는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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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문서에는 기록이 있습니까?

"1910년 8월 14일 동경유학생회가 한국개국기원축하회를 열면서 '윤치호가 새로 작사한 국가를 부르자'고 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습니다. 1915년 개성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이 압수됐을 때 '윤치호 작 애국가 등 불온창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1935년 경기경찰부의 조사 기록에도 '재미 조선인들이 부른 조선애국가'라며 윤치호를 언급했습니다."

―망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이 중 현재의 애국가가 어떻게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됐을까요?

"당시 40여 종의 '애국가'가 조사됐습니다. 윤치호의 가사가 수준이 높았습니다. 국민 계몽과 단결을 위해 찬송가 양식으로 지은 그의 애국가는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 학교로 확산됐고, 3·1운동 기간 민중이 선택했으며, 임시정부가 수용해 나라의 상징이 된 겁니다."

―상해 임정(臨政)에서 애국가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의 기록이 나옵니까?

"1919년 4월 10일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가 상징으로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 '태극기'가 정해졌지만, '국가(國歌)' 결정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 행사에서 첫 순서로 일동이 기립해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는 기록이 임정 기관지인 '우리통역'에 나옵니다."

―임정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승인했다는 뜻입니까?

"국가 대용(代用)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20년 의정원 회의에서 '애국가에 대한 수정안'이 상정됐으나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니 수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애국가는 임정에서 계속 사용돼 왔습니다. 1940년 임정은 '올드 랭 사인 곡을 안익태 곡으로 바꿔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북미대한인국민회의의 안건을 의결해 지금과 같은 애국가 곡조(曲調)가 된 겁니다."

―임정에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까요?

"김구 주석의 명의로 광복 직후 출간된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 韓國愛國歌)'라는 가사집이 있습니다. 표제 뒷면에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버렸다(중략)…'라는 김구의 글이 나옵니다."

―'일명(佚名)'이라면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뜻인데.

"윤치호는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15년 일제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풀려났습니다. 그 뒤로 친일 행적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애국가는 3·1운동에도 불리면서 항일 독립 의지의 표상으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김구가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고민이 있었던 겁니다."

―해방되면서 애국가 작사자로서 '윤치호'의 이름이 지워졌습니까?

"국내에서는 지우고 싶었을지 모르나, 1949년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영문판 '한국 소개(Introduction to Korea)'에는 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로 나옵니다. 1954년 영문 악보집 '코리아 랜드 오브 송(Korea Land of Song)'에도 '윤치호'로 명기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애국가'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습니까?

"광복 후 좌파 진영에서는 애국가의 후렴을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월북한 작사가 박세영이 지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라는 애국가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1992년 북한 국가로 승격됐습니다."

―윤치호는 60년간 일기를 써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애국가를 자신이 지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윤치호는 '실용영어문법' 등 7권의 책을 썼지만 일기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죽기 두 달 전인 1945년 10월 윤치호는 딸에게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써주며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표시했습니다(현재 미국 에모리대 소장)."

―당초 '안창호 작사설'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겁니까?

"광복 전까지는 단 한 건도 관련 문헌 기록이 없습니다. 1947년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 전기에, '애국가를 선생님이 지었느냐는 질문에 웃고 답하지 않았다(笑而不答)'는 구절이 나옵니다. 안창호 작사설은 이를 근거로 시작됐습니다. 안창호가 1908년에 '애국생(愛國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가'가 있지만 지금의 애국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안창호의 '소이부답'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가 '윤치호'라고 답변할 수 없었던 것은 애국가의 운명에 대한 배려였다고 봅니다."

―친일파 윤치호를 배려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후대 사람들은 피상적인 잣대로만 ‘친일’을 봅니다. 바깥으로 드러난 행적만이 전부가 아닐 겁니다. 신간회 사건으로 안창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윤치호가 보석금과 병원비를 댔습니다. 안창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윤치호의 지(志)와 성(誠)을 굳게 믿노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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