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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스피리추얼 코치 김필수의 참다운 나로 살기] 나를 옭아매는 마음의 감옥 허물고 스스로를 자유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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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담장이 없다

세계일보

내가 가끔 교도소에서도 강의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친구가 물었다. “너 교도소에 가면 무슨 내용으로 강의하냐?”/ “행복하게 생활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강의 제목은 ‘행복한 삶으로 리셋하라!’야.”/ “정말? 어떻게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하라고 얘기할 수가 있지? 네 강의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어?”

이번에는 내가 그 친구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지금 행복하냐?”

재작년 청주여자교도소에 강의하러 갔다가 만난 한 여성은 “이 교도소에서 천국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담장 밖에 있을 때는 늘 남편의 폭력과 괴롭힘에 시달렸고, 끝도 없는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가족들 병간호에 자기를 돌볼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도소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빨래해 주고, 아프면 병간호까지 해주니 이런 호강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적당한 운동에 좋은 교육을 받으며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 이런 천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수용자들도 이분처럼 생각할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려면 빨리 감옥에서 나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담장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자기 마음의 감옥에서 나와야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행복은 교도소 담장 안팎이 다르지 않다. 우리를 가두는 것은 담장이나 쇠창살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부정적인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작년 5월 충주구치소 강의에서 만났던 수용자가 여수교도소로 이송된 후에 보내주신 세 번째 편지다.

김필수 대표님께, 그동안 ‘참나에 관한 선언’을 아침저녁으로 외우다 보니 깊은 뜻을 모르고 외우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표님께서 추천하신 ‘리셋! 눈부신 탄생’과 ‘힐링: 내게 잠재되어 있는 참나를 만나다’를 읽고 난 다음 ‘참나에 관한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항상 희망과 소원을 가지고 생활하다 보니 모든 것이 새롭고 행복하게 보입니다. 백내장으로 수술을 했지만, 의료사동에 있으면서 어르신들과 너무나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모든 잡다한 설거지며 방청소를 솔선수범하였더니 너무나들 좋아하시며 이곳 병동에 오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또한 대표님의 강의와 명상을 통한 저의 마음가짐이 변하여 매사에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생활하다 보니 좋은 기운을 받아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비록 밖의 생활과 다른 절제된 생활이지만 이번 기회에 그동안 힘겹게 살아온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병을 치유하면서 규칙적인 삶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순간적인 실수로 이곳에 와 있지만, 이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동료가 많습니다. 부디 대표님의 ‘리셋’처럼 저의 인생도 새롭게 재부팅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앞으로 사회에 나가 꼭 보답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표님을 만나는 모든 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며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강의를 할 때 재소자들에게 전하는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영적 존재이며, 행복 자체가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육체라고 생각하면 교도소에 갇혀 있는 초라한 존재로 느끼겠지만, 무한한 영적 존재인 ‘참나’로 여기면 담장 안에서도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지를 보낸 수용자분은 강의 내용을 마음에 담아 실천하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리고 영적인 존재로서의 ‘참다운 나’에 대해 설명한 글 ‘참나에 관한 선언’으로 명상을 하면서 감옥 안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나’로서의 ‘참나’는 영원하고 싱싱한 생명이고 한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물질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매이지 않는 생각의 힘, 말의 힘이다.

우리는 가장 완전한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를 ‘신(神)’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신이 온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히브리 성서의 ‘창세기(創世記, Genesis)’에 보면 만물은 신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말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말’을 일반적인 ‘언어’나 ‘음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창화력(創化力)이 있는 신의 ‘말씀’은 영적 파동이며, 생각하는 모든 것을 현실화하는 창조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통해 발휘되는 창조의 능력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신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육체가 아니라 영(靈)이다. 그러므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적 존재다. 영적인 세계, 즉 우리 내면의 영성은 감각의 세계에서 인지되지 않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육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 개체적인 모습으로 보여도, 우리 모두에게는 신과 같은 성분인 신성(神性)과, 생각대로 현실을 창조하는 신적 능력이 있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며, 불성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조화로 나타난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같은 의미이다.

어떤 곳에서는 이것을 ‘언령(言靈)의 힘’이라고도 한다. 말에는 그 말의 내용을 실현하는 영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 모두가 자신이 사용하는 말의 힘으로 현실을 창조하며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영적으로 승화되어 있는 사람의 말은 분명히 현실이 된다. 말을 통해 표현되는 생각의 힘, 즉 염력(念力)이 발휘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생명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속한 존재인데, 감각적인 욕구와 충동에 속아 욕정과 분노와 억울함을 느끼는 감옥 같은 세계에 갇혀서 산다. 그러다 보니 생명과 사랑으로 빚어진 진리의 세계는 본래 있는 것인데 선악과로 상징되는 분별과 비교, 판단에 빠져 삶의 온갖 고통을 다 겪으며 산다. 천국에서 쫓겨나 현상세계의 감옥에 갇힌 것이고, 극락정토에서 중생의 세계로 유배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먼저 자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진짜 자기를 회복하려면 ‘참나’를 익히면 된다. 진짜 내가 싱싱한 생명이고 한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러면 몸이 있든 없든,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돈이 있든 없든,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의 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을 못나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의 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대한 생각의 힘, 신적인 말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신을 닮은 영적 존재이고 부처의 본질을 지닌 위대한 존재다. 이것을 알아갈수록 현실적인 문제들이 사라진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니 불편한 것이나 두려울 것이 없다. 늘 신선한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를 마음의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는 진정한 행복이다.

김필수 스피릿 컨설팅(주) 대표 hifeels@spir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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