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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Why] 영화 '1987' 그 골목길, 나른한 봄이 기다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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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화 작가 이미경의 구멍가게 오후 3시]

- 목포 서산동 만화수퍼

영화 속 '연희네 집' 근처 50년 된 작은 가게

한때는 만화방, 지금은 구멍가게

주인장은 친절한 터줏대감

오래오래 사랑받아야 하는 이 마을의 사랑방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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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 유달산을 뒤로하고 목포항을 바라보면 오른편에 서산동이 있습니다. 이곳은 목포의 근현대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건물로 빼곡합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다란 골목길의 가파른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탁 트인 보리마당에 다다르면 어깨동무하듯 옹기종기 모인 지붕들 너머 목포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한 이후 항구 바로 앞 유달동 일대가 일본인 거류지(居留地)였기에 지금도 일본식 가옥과 유곽(遊廓)이 남아 있습니다. 몇 해 전 이곳에 들렀을 때에 이미 재개발 촉진지구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동네 구석구석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가려고 애를 태웠습니다. 내딛는 발걸음, 닿는 시선, 어느 것 하나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켜켜이 쌓인 빛 바램이 아름다웠습니다. 모진 바닷바람을 견디고 지켜 낸 지난한 세월이 내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손에 닿을 듯 생생한 지난날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1987'에 등장인물 중 하나인 연희네 집 배경으로 서산동 골목이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언덕길 계단 아래에서 보았던 문 닫은 지 오래된 문방구를 영화 촬영을 위해 '연희네슈퍼' 간판을 내걸고 1980년대 모습의 구멍가게로 새로이 단장을 했습니다. 여기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맞은편에 만화수퍼가 있습니다. 주인 할아버지는 스물일곱 살에 이곳에 터를 잡고 세월이 어느덧 흘러 일흔여덟이 되셨습니다. 가게 이름이 '만화수퍼'인 까닭은 이곳이 50년 전에는 만화방이었기 때문입니다.

흑백 TV도 귀하고 그나마 라디오가 서민들의 커다란 위안이었던 1970년대, 딱히 이렇다 할 놀이 문화가 없던 시절에 만화책은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요즈음 아이들이 PC방에 들르듯 저 또한 하굣길에 만화 가게에 종종 들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컬러 TV가 나오면서 점차 만화 가게 인기가 시들해지자 '만화수퍼'로 간판을 고쳐 달고 구멍가게 문을 연 지 40년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터줏대감인 어르신은 모든 동네 대소사를 다 꿰고 계셔서 만화수퍼야말로 서산동 온금동 일대 동네 어르신들의 유일한 사랑방이며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준, 그래서 고맙고 위안이 되는 마음의 고향일 것입니다.

어르신께 봄날 찾아뵙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연희네슈퍼를 찾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한적했던 마을에 생기가 돕니다. 목포시에서도 여행자를 위한 추억의 회상 장소로 이곳을 유지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부디 지혜로운 개발과 보존을 통해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이곳이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곳으로 오래오래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산동에 따스한 봄날이 오면 잠시 삶의 속도를 늦추고 오수(午睡)를 즐기듯 나른한 산책을 해 보면 어떨까요?

[이미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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