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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Why] '썩은 유학자'들이 백두산에 종속시킨 한라산의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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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규의 國運風水]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는 진실로 때가 있으며, 산천 또한 땅기운을 모으는 때가 있다."('의룡경')

땅에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주장이다. 땅이 절로 때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 요인에 의해서다. 첫째, 급격한 인구 증감이다. 둘째, 사회경제 체제의 변화이다. 셋째, 문명(과학)의 발전이다. 척박한 땅이라 농사가 힘들어 겨우 바다에 의존하던 제주가 그랬다. 교통의 발달로 지금은 세계적 관광지가 되고, 서울의 '자본'이 제주도 땅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외로운 섬'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신비한 섬 '영주산'으로도 알려졌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서복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한라산은 바다에서 홀로 솟아올라[海中突出] 제주를 만들고 제주인을 수호해 온 진산이다. 그 산 모양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었으되 둥글어서(穹窿而圓) 원산(圓山)"이란 표현이 절묘하다.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처럼 둥글고 아래로 차차 낮아져 사방의 바닷가에 마지막 발을 담근다. 따라서 제주도 사람들은 한라산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며 살아간다. 한라산이 제주인들에게 끼치는 심리적·생리적 영향은 절대적이다.

유아독존 한라산이 백두산의 말단에 편입된 것은 조선 후기 "썩은 유학자[腐儒]"들의 풍수관 때문이었다(1908년 황성신문). '육지'와 아무 관련이 없는 한라산을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백두산→백두대간→호남정맥→무등산→월출산→해남→남해→한라산'이라는 '산의 족보'에 편입해버린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백두산 주산론'도 문제가 있다. 조선 초 백두산은 우리 영토가 아니었다. 15·16세기에 만든 조선 지도에는 백두산이 포함되지 않으나, 18세기 이후 지도에 백두산이 표기된다. 이중환은 백두산을 조선 산맥의 머리로 보았는데, 그의 재종조부 이익이 조선 산줄기의 근원이 백두산이라고 한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모든 것을 신분제화하려는 유가의 종법(宗法)적 관념이다. 그런데 백두산은 후기 조선의 주산이자 청나라의 영산이었다. 후기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을 공동 주산으로 삼은 셈인데, 지금도 백두산을 북한과 중국이 균분하고 있음에서 그 흔적이 드러난다. 백두산이 성지가 된 것은 김일성가의 '백두 혈통'론에 따라서이다. 그럼에도 남한의 많은 사람은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 어렵게 올라가 우리 민족의 영산에 감격한다.

최근 한라산의 '존엄'함을 인식한 이는 이번에 방문 공연한 삼지연관현악단의 현송월 단장이다. 그녀는 '백두와 한나(한라)는 내 조국'을 열창하였다. 백두산과 한라산을 동격으로 보았다. 지난 10일 북측 고위급 대표단을 맞는 청와대 오찬에서 '한라산' 소주가 건배주로 등장하였다. 현 단장이나 청와대 모두 한라산의 본래적 존재를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제주가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 고영희의 고향임을 염두에 두어서일까? 제주 조천읍 북촌마을은 고영희 부친 고경택이 태어나 자랐던 곳이며,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열안지오름 자락에 고경택 형제와 윗대 조상을 모신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모든 묘가 가까운 산(오름)에 기대어 조성된 것과 달리 이 가족묘는 저 멀리 한라산에 머리를 대고 있다. 뭇 신하의 조례를 받는 군신봉조(群臣奉朝) 형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에 대해서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 하였지만, 언젠가 정상회담이 제주에서 열린다면 한라산은 진정 '복권'될 것이다. 또 김정은이 외가 고향과 선영을 한번 둘러볼 수도 있지 않은가.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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