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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강제된 침묵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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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양경언의 시동걸기

한겨레

김경후 ‘오르간파이프선인장’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 2017)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창비, 2017)에서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때 쓰는 ‘고요(quiet)’와 겁박이나 억압을 통해 조성되는 ‘침묵(silence)’을 구별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침묵을 강제하면서 벌어진다고 했다. 목소리를 내는 일이란 특정 필요에 의해 형성된 조직에 참여하는 능력,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능력 모두를 이르므로 강제된 침묵은 곧 목소리에 수반된 모든 일을 빼앗긴 상태라는 것이다. 솔닛은 침묵을 강요받던 사람들이 말하고 그 말들이 경청되는 조건을 만들면서 오늘날에 이른 인간의 역사를 짚으며, 지금도 그와 같은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해시태그 ‘미투(MeToo)’ 운동을 비롯, 근래 각계각층에서 진행되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 운동은 강요된 침묵을 깨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고하게 젠더 편향적인 구조로 이뤄져왔는지를 일러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당함을 인지하기까지 회귀하는 기억과 내내 싸우면서 기어이 ‘생존한’ 목소리들의 값진 용기 덕분에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은 목소리들이 이전엔 왜 들릴 수 없었는지를 성찰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이슈가 교차하는 목소리들이 어떻게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사막과 같은 삶에서도 제 목소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는 이들이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일까. 김경후 시에 등장하는 ‘침묵’이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시에서 ‘침묵’은 소리의 볼륨을 낮추는 방식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외부의 상황과 생존의 조건이 목소리의 사라짐을 강요하는 상태에서도 나 자신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말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있는 것 같다.

“사막에 산다는 거,/ 그건 울지 않는다는 거,/ 대성당에도 늪에도 살지 못한다는 거,/ 울지 못해 타오르고, 울기 전에 타버리는 거,/ 그게 사막선인장,/ 오르간파이프선인장,// 나를 울릴 부드러운 손가락도, 악보도, 오아시스도,/ 왜,/ 이 세상 모든 노래가 사라졌지,/ 왜 내게,/ 그런 거,/ 사막에 산다는 거,// 하지만 그런 거,/ 마지막까지 묻지 않는 거,/ 노래가 아니라 침묵이 사라져도 진심으로 대답 않는 거,// 그게 사막의 가을,/ 그게 나뭇잎 대신 납빛 가시를 만드는/ 사막선인장,/ 오르간파이프선인장,/ 도끼로나 찍을,/ 모래 폭풍이나 흔들 수 있는,/ 그런 거,/ 사막에 산다는 거,// 그건 사는 것도 아냐,/ 만약 당신이 비난한다면,/ 그건 당신보다 사막에 대해,/ 사막보다 사막에 대해,/ 내가 하나 더 알고 있는 거,…(후략)…”(김경후, ‘오르간파이프선인장’ 부분)

어떤 삶은 어째서 너는 참혹을 겪으면서 울지 않느냐는 의혹도, 노래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는 게 사는 거냐는 비난도 넘고 넘어 “오르간파이프선인장”처럼 “납빛 가시”를 품은 채 “사막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시의 행간에 놓인 쉼표들이 내부의 긴장을 생존의 리듬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결국 그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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