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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철학자와 정치학자, 제주4·3의 윤리를 성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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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2일 천주교 제주교구 ‘70주년 학술심포지엄’

70년 전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일어났던 비극은 오래동안 침묵 속에 묻혀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에 대해 국가가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분단 현실이 여전한 한 ‘제주4·3’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철학자와 정치학자가 함께 제주4·3에 대한 성찰에 나서 주목된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22일 천주교 제주교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여는 ‘제주4·3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자로 나선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4·3 70주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4·3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해 여러 기념 사업을 펴기로 했는데,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그 일환이다.

김상봉 교수
“내면적 믿음·혁명적 실천 같이한
‘한국민중항쟁’ 맥락서 본 4·3
정당한 무장투쟁, 증오로 변질되며
‘배반당한 항쟁’ ‘분단의 비극’으로”


한겨레

김상봉 전남대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발표문에서 김상봉 교수는 한국 ‘민중항쟁’의 성격과 그 속에 담긴 윤리가 무엇인지 성찰한다. 4·3은 주로 ‘국가폭력에 의한 대량학살’이란 틀로 인식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봉기에 나섰던 무장대 역시 비무장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장대의 경우에는 그 폭력 행사의 정당성이 여전히 충분하게 논의되고 판단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 그는 ‘무장항쟁’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선 “기존의 국가권력이 비무장 시민을 폭력적으로 공격하여 정치적 상태가 국가 기구와 민중 사이의 전쟁 상태로 퇴행했어야 할 것, 항쟁은 그렇게 전쟁상태로 퇴행하여 해체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수행되어야 할 것, 폭력 사용에 있어서 일정한 내적 절제와 규율을 스스로 지켜야 할 것” 등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봤다.

여기서 한국의 민중항쟁사에 대한 김 교수의 독특한 관점이 제시된다. 특정 종교체계에 갇히지 않지만 어떤 영성, 곧 “내면적 믿음과 혁명적 실천의 공속”이 한국 민중항쟁에 담긴 주된 성격이었다는 주장이다. 무장봉기에 나선 동학농민군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동물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내걸었다. 의병장 안중근은 “약하면서도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대적한다”며 압수한 총포까지 내어주며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 이 같은 “‘힘’이 아니라 ‘뜻’이 존재의 진리라는 믿음”과 혁명의 공속 또는 합일이야말로 3·1운동 같은 비폭력 저항, 전태일 같은 자기 폭력뿐 아니라 무장항쟁까지 아우르는 한국 민중항쟁의 특성이었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한국의 민중들이 패배하고 또 다시 패배하면서도 불의에 대한 저항과 항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내면의 근거였다.”

이렇게 볼 때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서, 또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봉기로서 제주4·3은 정당한 무장항쟁임이 분명하지만, 내면의 믿음을 잃고 분노와 증오로 흘렀다는 점에서 ‘배반당한 항쟁’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제주만의 비극이 아니라 분단의 비극, 곧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4·3의 비극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은 절망 가운데서 현실 타협과 보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운동이 급진적 투쟁의 길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상호간의 반목에서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분단 현실이 단지 땅의 갈라짐이 아니라 적대적 대립과 폭력에 기댄 마음의 갈라짐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박명림 교수
“마을 주민들 자발적 모금으로
가해자·피해자 위령비 함께 세운
하귀마을 화해와 상생 노력
‘세계보편모델’ 될 수 있어”


한겨레

박명림 연세대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박명림 교수는 발표문에서 이 같은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화해와 치유를 모색해온 제주의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세계보편 모델’로 발전시킬 가능성을 타진한다. 박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절대적인 대립의 현장이었던 제주가 되레 온갖 차이들을 넘어 보편적인 지평으로 나아가는 ‘혁명적인 자기 변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혁명적인 자기 변혁을 통한 평화, 인권, 화해, 상생”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박 교수와 김 교수의 주장은 겹친다.

제주 애월읍 하귀마을은 4·3 당시 온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정도로 인명피해가 컸던 곳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국가의 진상조사가 완료되기도 전인 2003년 5월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영모원 위령단을 건립해, 스스로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나섰다. “더욱 놀라운 점은 집단정체성의 복원 자체에 머물지 않고, 국가와 학살자를 포함한 모두의 포용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영모원에는 4·3 희생자 위령비뿐 아니라 항일인사 영령, 전몰 호국 영령 등을 모시는 등 모두 5개의 비가 세워졌고, 식민과 분단, 독립과 건국, 4·3과 한국전쟁과 호국의 시기 동안 거의 모든 가해자와 피해자의 명부를 한 곳에 모셔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각각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제주4·3 희생자유족회(유족회)와 제주 재향경우회(경우회) 역시 손을 맞잡고 함께 화해와 상생을 추구해왔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제주 모델’이 과거의 복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로, 또 세계적 차원의 보편적인 모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한국전쟁은 내전도 국제전도 아닌 전형적인 세계시민전쟁이었으며, 그 전사였던 제주4·3 역시 전형적인 세계시민적 갈등이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제주로’의 이 도래방식과 피해공식을 뒤집어, ‘제주에서 세계로’ 화해와 상생의 모델을 수출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오늘의 제주는 폭력이 아닌 용서가, 적대가 아닌 관용이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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