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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지역이 중앙에게] 짓다, 잇다 / 명인(命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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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명인(命人)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발포라는 전남의 바닷가 마을, 여성노인정에서 노래교실을 열었던 적이 있다. 한때 가수였던 내 전직을 아는 지인의 청이라 거절도 못 하고 어떻게 진행할까 고민을 하다가 신이 날 만한 트로트를 잔뜩 준비했다.

노래교실 첫날, 75살부터 102살까지의 노인들을 만났다. 한 소절, 한 소절 노래를 가르쳐드리는데, 아뿔싸! 부러 전지에 크게 써간 가사는 아무 소용도 없더라니. 글을 아는 분이 거의 없다. 꽤 유명한 노래를 준비했는데도 노래를 아는 분도 없는 것 같다. 할머니들의 품새를 보니 젊은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애를 쓰니 안쓰러워 참여해준다는 느낌이다. 나는 진땀을 빼다가 할머니들께 아는 노래 있으면 한번 해보시라 청을 드렸다. 70대까지는 자연스레 트로트가 나온다. 그런데 80살 이상부터는 노래라면 당연히 민요가 나온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

나는 작전을 바꿨다. 준비한 건 다 팽개치고 할머니들께 노래를 가르쳐달라 졸랐다. 어떤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분은 없었지만, 한 분이 생각나는 소절을 부르면 다른 한 분이 다음 소절을 이어가고, 돌아가면서 기억을 되살려냈다. 진도아리랑의 가사가 70종이 넘는다더니 정말이지 내가 듣도 보도 못했던 가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라. 내가 한 소절씩 할머니들을 따라 하니 “잘 헌다이” 추임새가 나오고, 어느 날엔 장구가 ‘짠’ 하고 등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두어 달을 만나는 동안 할머니들이 퍼즐 조각 맞추듯 가까스로 기억해 낸 민요 두 곡을 나는 배웠다.

할머니들께 내가 배운 건 노래만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내가 신기해하며 물어대는 할머니들의 삶에, “요즘 사람이 뭘 그런 걸 다 궁금해한당가?” 하면서도 일러주시는 삶의 지혜들. 주눅 든 것처럼 알지도 못하는 글을 보며 재미도 없는 노래를 따라 하던 할머니들이 정말로 신나 보였다. 시쳇말로 힐링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싶더라.

열댓 살에 가난한 바닷가 마을로 시집와서 들일에 바닷일에 집안일에, 전천후 슈퍼우먼이었던 할머니들의 고생담엔 내가 이제 와서 해외 사이트를 뒤져가며 배우려는 온갖 기술들과 비법들이 들어 있었다. 목화를 심어 솜을 얻고 실을 자아 옷감을 짜고 옷을 짓던 이야기. 어떤 씨앗은 언제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달이 차고 기우는 걸 보고 물때를 가늠하고, 우럭조개는 어디서 어떻게 잡고, 수온과 해류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가 어떻게 다른지….

75살 이하로는 아예 노인정에 발길도 않는단다. 층층시하에 맨날 심부름이나 해야 할 텐데 오고 싶겠냐며 거기 끼면 눈치가 보이는 우리나 이리 오는 거지 하시는 분이 76살이다. 생각해보니 80살을 기점으로 그 이하 연세인 분들이 젊었을 때 기계농이 시작되었고,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 노동요가 사라진 것과 그분들이 트로트를 알게 된 것이 바로 그때인 것.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대개 ‘짓는’다더라.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짓고, 옷도 짓고, 노래도 짓는다. 하나같이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물론 사람은 무리도, 짝도 업도 짓고 죄마저, 짓는다. 이런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소비로 대체하는 사이, 사람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나 역시, 천금을 준대도 몸서리나는 고생과 지독한 가부장제로 신음하던 할머니들의 젊은 날로 돌아갈 맘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고운 손으로 시골엔 뭐 할라꼬 왔당가. 여자가 시골 살믄 월매나 고생시러븐디” 하시며 내 손을 꼬옥 잡던 발포 할머니들의 따뜻한 손과 눈망울을 떠올릴 때마다 ‘짓다’에 이어 ‘잇다’를 생각한다.

사람 인(人) 자가 그러하듯 사람은 본시 기대어 살았고, 인간(人間)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사이’(間)를 의미한다. 사람이 ‘짓는 일’을 하찮게 여기면서부터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되었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시대와 시대의 ‘사이’는 끊어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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