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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매경춘추] 지붕 없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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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필동은 1980년대 초만 해도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았다. 남산을 병풍 삼아 실개천이 흐르고 개나리, 벚꽃, 라일락 등 온갖 꽃과 나무가 마당에 가득한 집들이 어우러져 언젠가 꼭 살아보리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중구청장이 된 후 찾은 필동에는 예전 모습이 조금도 없었다. 환경이 가장 잘 보전돼야 하는 1·2종 주거지역임에도 인쇄공장이 몰려들면서 소음과 분진, 역주행 지게차, 삼륜차 등으로 생활환경이 심하게 훼손됐다. 갈등이 계속되면서 원주민은 하나둘 떠났고 골목마다 각종 쓰레기와 무단 적치물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동국대 학생과 교직원 2만여 명이 필동을 지나쳐 홍대 앞 등으로 가버렸고 주변 상인은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데 관심도 없었다. 연간 100만명 넘는 관광객이 찾는 한옥마을은 높은 축대로 필동과 단절돼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적극 후원하며 나라를 구한 서애 류성룡 대감 집터는 엉뚱한 자리에 작은 표지석만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난개발된 채 방치된 필동을 그냥 둘 수 없었다. 6년 전부터 서애 류성룡 대감의 정신이 담겨 있는 이 동네에 서애기념마당을 조성하고 남산과 주변 역사 문화에 걸맞은 대학문화거리로 살리고자 팔을 걷었다. 공장은 더 이상 못 들어오게 하고 젊은이들이 매력을 느끼며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 한옥마을과 남산에 오는 관광객들까지 즐겨 찾도록 계획했다.

처음에는 모두 시큰둥했다. 그래서 동국대 학생·교수·동문회는 물론 주민들과 수시로 만나 이 사업의 비전을 공유했다. 또 유명 예술 경영인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간담회를 여는 등 문화시설 투자 유치에 지속적으로 힘을 쏟았다.

그 결과 3년 전부터 필동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필동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인들이 우리 계획을 믿고 투자에 나섰기 때문이다. 어둡고 후미진 육교 밑이나 자투리땅에는 길거리 미술관 8곳이 들어섰다. 필동 24 일대에 소공연장, 북카페, 갤러리 등 복합예술 공간이 생기고 필동삼거리에도 뮤지엄과 갤러리가 자리 잡았다. 지붕 없는 미술관인 셈이다.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만드는 골목 축제 '예술통'도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낙후된 채 방치된 골목도 그 가치를 알아주고 잘 가꾸면 보물이 될 수 있다. 그 가치를 발굴하는 일은 골목의 주인인 우리 몫이다. 작은 관심과 노력이 널리 퍼져 도심 곳곳에 새로운 문화가 피어나는 꿈을 꿔본다.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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